▲ 이건희 삼성 회장 | ||
문제의 발단은 지난 99년 삼성차에 대한 법정관리가 결정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성측은 삼성차 경영부실로 빚어진 채권단 손실액 2조4천5백억원을 갚겠다며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채권단에 넘긴 바 있다. 삼성생명 상장을 전제로 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해 2조4천5백억원에 해당하는 3백50만주는 채권단 손실 충당액으로, 그리고 나머지 3천5백억원에 해당하는 50만주는 종업원들과 하청업체에 대한 위로금 용도로 내준 것이다.
그러나 삼성생명은 아직까지 상장을 못하고 있다. 채권단은 현재 삼성생명 주식 장외가격을 99년 당시 삼성측이 매겼던 주당 7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주당 20만원대로 책정해 놓고 있다. 채권단 논리로 보자면 삼성생명 주식 매각으로는 삼성으로부터 받기로 한 금액을 충당할 수 없는 셈이다. 채권단은 삼성측이 애초에 약속한 2조4천5백억원에 그동안의 이자를 합산해 6조원의 상환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측은 “99년 당시 도의적 차원에서 주식을 채권단에 준 것이지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에 대한 채무를 채권단에 상환해야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삼성차 채권 문제가 ‘6조원 소송’으로 확전된 것은 지난 99년 당시 채권단과 삼성측이 공동작성한 합의서 내용 때문이다. 99년 6월 삼성차 법정관리 결정 이후 빗발치는 비난 여론 속에서 삼성측은 이건희 회장 사재 출연을 통해 채권단에 빚을 갚겠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채권단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채권단은 삼성측에 돈이나 주식에 대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 법률적으로 따지면 법정관리에 넘어간 계열사에 대해 그룹 총수가 빚을 갚아야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삼성측이 먼저 기자회견을 해서 돈을 갚겠다고 해놓고선 지금까지 제대로 갚지 않고 있는 것”이라 밝혔다. 이는 도덕적 책임을 어느 정도 면피한 삼성이 약속이행을 하지 않는 점을 꼬집는 것이다.
기자회견 직후 채권단은 삼성측에 “빚을 갚겠다면 주식이 아닌 돈으로 달라”고 요구했으며 결국 양측은 삼성차 법정관리 결정 이후 두 달이 지난 99년 8월 이에 대한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당시 양측이 작성한 합의서는 ▲삼성측이 2000년 12월31일까지 삼성생명 주식을 팔아서 채권단에 돈을 갚을 것이며 ▲만약 그 안에 주식을 팔아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연체이자도 물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현재 채권단이 보유한 삼성차 채권의 시효가 올해 말까지이기 때문에 올해 안에 삼성이 돈을 갚지 못할 것 같으면 소송을 해서라도 받아내겠다는 것”이라 밝혔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삼성생명이 상장될 것으로 알고 이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내준 건데 상장이 무산된 바람에 일이 꼬였다”며 “이 회장이 반드시 물어줘야 하는 돈도 아니고 도의적 차원에서 주식을 넘겨준 것인데 삼성생명 상장이 안된 것이 문제지 삼성그룹과 이 회장이 도의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니다”고 맞받아친다.
그러나 채권단은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아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삼성차 법정관리 결정 이후 생긴 부실은 이 회장의 사재 출연을 전제로 채권단이 해결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삼성차 매각에 성공했으며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연간 순이익 1백억달러를 내는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이 삼성생명 주식을 팔아서 빚을 갚겠다고 합의서를 작성했으나 현재 삼성생명 주식 매각을 통한 상환이 여의치 않으므로 다른 방법으로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합의서 내용에 따르면 채권 시효는 올해 말이다. 채권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소송이라도 해서 돈을 받아낼 것”이라 밝혔다. 합의서엔 2000년 12월31일 안에 돈을 갚지 않을 경우 삼성측이 연체금리(19%)까지 물겠다고 돼 있다. 원금 2조8천억원과 99년 8월부터 지금까지 연체금리를 적용한 금액 3조4천억여원을 합하면 6조원을 상회한다.
채권단은 아직 소송절차를 밟고 있지는 않다. 소송이 다른 방법으로 해결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취지에서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삼성생명 주식이 상장돼서 이를 매각하면 애초에 삼성이 지불하기로 한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삼성생명 상장 여부에 달려있다”며 난감함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생명 주식을 채권단이 주당 70만원에 매각한다 해도 3조4천억원가량에 이르는 연체이자 문제가 남아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삼성-채권단 간 갈등의 골은 당분간 계속해서 깊어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