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쳤던 곳엔 국제금융센터, 커터칼 피습 골목은 그대로…‘선거의 여왕’ 타이틀 얻었지만 탄핵 ‘비극’으로 끝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8년 재보궐 선거, 2000년 2004년 총선에서 모두 이기며 3선 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박정희 전 대통령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2004년과 2006년 당의 중요한 선거를 진두지휘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통했다.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이른바 ‘친박’ 인사들이다.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가에선 박 전 대통령 정치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로 2004년을 꼽는다. 2002년 대선을 전후로 제1야당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썼다. 2004년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결의하며 ‘탄핵 역풍’에 직면했다. 탄핵 반대 여론이 70% 가까이 됐던 까닭에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은 거셌다. 한나라당엔 패배 위기감이 짙게 깔렸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인물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4년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해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자랑하던 초호화 당사 여의도 아시아원빌딩을 박차고 나와 ‘천막당사’에서 당무를 보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천막당사는 옛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에 들어섰다.
2004년 3월 23일 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한 이후 기존 당사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다.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는 취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대표 취임 당일 “다른 건물 전세 얻는 게 마땅치 않다면 천막이라도 치라고 얘기해 놨다”고 했다. 그리고 취임 이튿날 박 전 대통령은 직접 한나라당 현판을 떼 천막당사로 가져갔다.
천막당사라는 파격 카드를 꺼낸 한나라당은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천막당사 체제에서 치른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차지하며 제1야당 지위를 유지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152석 과반 의석을 얻었다. 영남에서조차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이 강하게 불었던 것을 감안하면 선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에 동참했던 새천년민주당은 호남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며 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노동당(10석)에 이어 제3야당으로 주저앉으면서 역사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졌다.
탄핵 역풍이라는 역대급 악재 속에서 천막당사라는 파격 카드로 선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공고해졌다.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 인사는 “사실 천막당사라고 해서 임대료를 엄청 아꼈을 거라고 예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당시 서울특별시에 천막당사 부지 임대료로 4200만 원 정도를 지불한 것으로 안다”면서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 월세와 비슷하거나 더 비싼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천막당사를 출입했던 전직 언론인은 “천막 안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기사를 작성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기자들 사이에선 왜 한나라당이 쇄신을 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같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는 푸념 섞인 불만이 들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2022년 현재 천막당사 자리는 몰라볼 만큼 달라져 있다.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였다가 천막당사 부지로 활용된 뒤 이곳은 주차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초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서울국제금융센터(IFC)다. ‘초라함’을 바탕으로 쇄신 이미지 구축을 위해 낙점됐던 그 장소는 현재 금융 중심지 여의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들어선 땅이 됐다.
17대 총선 2년 후인 2006년 지방선거에선 박 전 대통령 ‘선거의 여왕’ 이미지가 다시 한번 부각됐다. 2006년 5월 31일 펼쳐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지방 광역단체장 16자리 중 13자리를 석권하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을 거뒀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과 더불어 지방선거를 열흘가량 앞두고 터진 대형 이슈가 선거판도를 뒤흔들었다. ‘커터칼 피습사건’이었다. 2006년 5월 20일 한나라당 대표 신분이던 박 전 대통령은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 장소는 신촌 현대백화점 인근 골목이었다. 50세 남성 지충호 씨가 커터칼로 박 전 대통령 얼굴을 공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얼굴에 피를 흘리며 인근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됐다.
박 전 대통령 개인의 불행은 정치적 호재로 작용했다. 커터칼 피습사건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한나라당을 향한 표심으로 이어진 까닭이었다. 열린우리당 염홍철 후보 우세가 예상됐던 대전시장 선거에서도 판도가 뒤바뀌었다. 커터칼 피습사건을 기점으로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지지세를 확장하며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박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대전은요?”라고 했다는 말이 보도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이 수술 다음 날 대전 판세를 물어본 게 부풀려져서 알려졌다고 한다.
커터칼 피습사건은 대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지율이 앞서던 지역에선 승리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이 피습당했던 신촌 현대백화점 옆 골목 자리는 ‘천막당사’ 부지와 달리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피습 당시 존재했던 몇몇 영업장은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들도 이 골목을 ‘커터칼 피습사건 현장’이라고 느끼기보다는 평소에 자주 지나가던 거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20대 남성 김 아무개 씨는 “이 골목은 평소에 자주 오가는 길”이라면서 “‘커터칼 피습사건’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했다. 40대 여성 최 아무개 씨는 “커터칼 피습사건을 알고 있다. 한때 굉장히 이슈가 되지 않았느냐”면서 “그 사건이 이 골목에서 일어난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2004년 총선 선전에 이어 2006년 지방선거 압승을 진두지휘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선주자급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국정농단 사건과 탄핵정국으로 이어진다. 탄핵 소용돌이가 몰아친 뒤 구속된 박 전 대통령은 2021년 12월 30일 사면됐다.
한나라당 시절 고위 당직을 지낸 한 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4년과 2006년 자신의 캐릭터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선거를 잘 운영한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선거의 여왕 이미지를 가진 뒤 대통령이 된 다음 탄핵 소용돌이에 말려들며 정치적으론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점 역시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개인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자신을 선거의 여왕으로 발돋움시킨 몇 가지 사건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건으로 기억될지, 아니면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겪은 각종 비극의 뿌리로 기억될지는 본인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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