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생 걸그룹 멤버 불륜’ ‘성관계 요구 유부남 배우’…근거 없는 네티즌 주장 확인 없이 기사화 악순환
#‘폭로’는 있는데 ‘실체’는 없다?
2월 5일 한 온라인 게시판에는 ‘남편이 연예인이랑 바람나서 낙태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의 작성자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가수가 3인조 걸그룹 출신 A 씨이며, 1988년생이라고 특정했다. 이 글은 삭제됐지만 이미 수많은 온라인 게시판과 블로그를 통해 일파만파 번졌고, 관련 기사들도 쏟아졌다.
이 과정에서 그룹 가비앤제이의 멤버 제니와 서린의 이름이 거론됐다. ‘3인조 걸그룹’, ‘1988년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부합된다는 추측뿐,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비난과 억측이 쏟아지자 가비앤제이 제니는 2월 12일 자신의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사에 제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황당하다”며 “사실이 아니기에 별다른 대응 없이 시간을 보냈지만, 제 이름을 거론하는 분들은 더 많이 생겨나더라”며 토로했다.
유사한 사례는 학폭 논란 속에도 종종 불거졌다. 몇몇 연예인을 향한 학폭 폭로가 사실로 입증돼 사과하자, 비슷한 류의 폭로가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주장도 나왔다. 방송인 홍현희, 걸그룹 이달의소녀의 멤버 츄, 배우 최예빈 등이 가해자로 지목받았으나 이를 부인했고 최초 글을 작성한 이들이 사과하며 누명을 벗기도 했다.
홍현희는 소속사를 통해 “학창 시절 내 외모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는데 무슨 친구 외모 비하를 하면서 왕따를 시켰겠느냐”며 고소장을 접수했고, 폭로자가 입장을 바꿔 고개 숙이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이미지 실추는 감수해야 했다.
2021년 9월에는 배우 허이재가 유튜브 채널 ‘웨이랜드’에 출연해 “한 남자 배우로부터 성관계 요구와 폭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허이재는 이 배우를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유부남’이라고 말했고, 네티즌은 과거 허이재와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을 일일이 체크하는 과정에서 오지호의 실명까지 거론했다.
이에 오지호 팬들까지 입장문을 발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급기야 허이재는 “저로 인해서 억울하게 거론된 배우께 전화를 드려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전했다”고 고개 숙였다.
이 같은 폭로는 이미 연예계의 부정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특정 온라인 게시판은 ‘폭로의 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사실 여부를 떠나, 폭로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여론과 매체가 춤을 춘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뒷전”이라며 “그로 인해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런 것은 아랑곳 않고 폭로 자체를 즐기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무분별한 폭로, 왜 반복되나
이 같은 폭로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엄청난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유명 연예인이 가해자로 지목받으면 파급력은 더 커진다. 무명일지라도 이니셜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대중적 관심은 증폭되고, 그 사이 언급된 모든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
몇몇 폭로가 사실로 밝혀진 것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기제로 작용했다. 학폭이나 갑질 피해를 폭로한 몇몇 주장은 실제로 유명인들의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냈다. 과거 억울한 일을 당했던 이들이 SNS의 발달로 인해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고 이를 바로잡을 기회로 삼는 순기능이 발휘된 셈이다. 하지만 거짓 폭로나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주장으로 인해 애먼 피해를 입게 되는 유명인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네티즌의 폭로보다 이를 다루는 일부 매체의 잘못이 더 크다는 주장도 있다. 익명 뒤에 숨은 불특정 네티즌의 주장이 불거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공신력과 파급력을 고려했을 때, 이를 기사로 옮기는 매체의 태도는 달라야 한다. 최소한의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매체는 많지 않다. 통상 ‘OOO이 XXX라고 주장을 했다’고 그대로 옮겨 적는 식이다. 그리고 누군가 문제를 삼으면 ‘우리는 어떤 주장이 불거졌다고 보도했을 뿐, 사실 여부를 단정 짓지 않았다’고 발뺌한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다.
왜 이런 보도가 늘어났을까. 결국 클릭 수와 페이지뷰를 늘리려는 속셈 외에는 딱히 답을 찾을 수 없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가 존재할 때는, 소위 ‘검색어 따라잡기’라는 어뷰징 기사를 확대 재생산하며 클릭 수 장사를 해왔다. 하지만 실시간 검색어 서비스가 사라진 후에는 자극적 이슈를 좇거나 만들어내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데 몰두하는 모양새다.
연예 매체에서 일했던 한 전직 기자는 “솔직히 ‘취재’라는 건 거의 없었다.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 앉아 각종 인터넷 게시판이나 댓글을 뒤지며 대중이 혹할 만한 이야기를 찾아냈다. 기사의 질이 아니라 클릭이 많이 나오면 칭찬을 받는 구조였다”면서 “물론 모든 매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현장에서 만난 적잖은 연예 기자들이 이렇게 일하고 있었다. 그런 매체들이 무분별한 폭로로 인한 문제가 불거지면 손바닥 뒤집듯 이를 꾸짖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환멸을 느껴 일을 그만뒀다”고 고백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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