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은 단순한데 자연이 그린 형상은 깊이깊이 파고든다. 어느 하나 똑같은 것 없다. 화려하다 싶으면 단출하고, 꽉 찼나 하고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는 듯하고, 너무 강렬해서 한두 발 물러서 보면 어느새 친숙하다. 나의 눈과 작품 사이에는 자연이 있고, ‘자연’이야말로 내가 소화해야 할 과제라는 것을 작품이 보여주고 있다.
10년 동안 침묵했던 것처럼 보였던 김아타가 ‘on-nature’, 우리말로 ‘자연하다’라는, 낯선 듯 친근한 주제로 5월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마석 모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단다. 그나저나 ‘자연하다’라니. 이어령 선생의 해석이 탁월하다.
“‘자연하다’는 우주에 늘어놓은 빨래와 같다. 허공에 무지개와 같은 줄을 치고, 거기에 청결한 빨래를 한 것과 같은 작품이 걸린다. 무엇이 나타나겠는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자연에, 바람에 맡기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상상할 수 없는 문양들을 만든다. 이것이 ‘자연하다’이다. 찢어지고 주름지고, 겹친 그것이 시간이고, 바람이고, 우주이다. 이것이 ‘자연하다’의 철학이다. 그리고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자연이라는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그것이 ‘자연하다’이다.”
사진작가로 출발한 김아타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진 버리기 의식을 했다. 그는 평생 그의 시그니처인 사진을 버리고, 세계 곳곳에 캔버스를 세웠다. 도시에도 세우고 숲에도 세우고 땅속에도 묻고 바다 속에도 묻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캔버스가 경험한 시간, 캔버스 위를 지나간 자연스런 시간을.
한 생명이 태어나 숱한 경험을 하며 그 얼굴과 몸짓을 갖게 되는 것처럼 그가 심고 세운 캔버스는 캔버스가 경험한 것을 고스란히 담았다. 빛과 어둠을, 열기와 냉기를, 바람과 비를, 도시의 매연까지 모두모두 담았다.
김아타의 작품은 물음이다. 그는 자연이 그림을 그린다고 마치 답을 주듯 표현했지만 그의 작품은 물음이다. 너는 어디에 서있는가. 너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가 자연에서 왔다는데 별 이의 없이 동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가 자연에서 왔는지, 아닌지. 우리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햇빛을 차단해야 하는 자외선이라 여기고, 비와 이슬을 맞지 말아야 하는 감기라 생각하며 오로지 스펙을 만들고 업적을 쌓아 성공적인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아온 우리가, 우리가 자연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느끼며 살겠는가.
바쁘고 아프고 박제된 채로 시간표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자연이 그림을 그린다는 메시지가 우리의 근원이 자연이라는 사실에 가닿겠는가. 내 젊은 날은 그랬다. ‘빨리빨리’를 순발력이라 믿으며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누구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매일매일 정체 모를 불안을 에너지로 늘 산만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긴긴 불면의 밤들이 찾아오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니 남의 일인 줄 알았던 니체의 낙타가 바로 나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내가 내 짐도 아닌 짐을 지고, 그것도 감당하기 힘든 덩치 큰 짐을 지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은 나를 방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잊은 자연이, 나를 키운 생명의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이 이별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처럼 자연의 부재에 대한 각성이 자연에의 지향성을 만들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나를 본다.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으나 얻은 것은 허구 같고 이제 허구 같지 않은 내 집을 찾아 헤매는 내가 보인다. 자연에서 왔다는 것을 잊고 산 나, 그것까지 자연이었다고 고백하고 나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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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