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기습적으로 이뤄진 이번 김 감독 경질을 두고 야구계는 ‘충격’이라는 반응 일색이다.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진출과 이 가운데 우승 3회를 거둔 감독을 구단이 시즌 중 경질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미 예견된 일”이라며 “애초부터 SK와 김 감독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5년 김 감독이 처음으로 SK와 접촉했을 때부터 2011년 8월 경질될 때까지를 <일요신문>이 돌아봤다.
#성적·인기 최하위였던 SK
2000년 SK는 쌍방울을 인수해 창단했다. 원래 SK가 원한 연고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LG·두산 서울 구단들의 반발로 인천에 터를 잡았다. SK의 인천 정착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창단 첫 해 SK는 8개 구단 가운데 꼴찌에 머물렀다. 내심 7위를 기대했지만, 현격한 실력 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홈경기 평균 관중도 바닥이었다. 그 해 문학구장을 찾은 총관중은 8만 4563명이었다. 경기당 1281명에 불과했다. 롯데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듬해부터 SK는 전력강화와 팬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자유계약선수(FA)를 적극적으로 영입했고, 좋은 신인선수를 확보하고자 전국을 누볐다. 마케팅팀은 인천지역에 공짜표를 뿌리면서 “일단 문학구장에 한번 찾아오시라”며 통사정했다. 그런 노력이 빛을 낸 것일까. 2003년 SK는 창단 4년 만에 첫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비록 현대에 3승4패로 분패하긴 했지만, SK는 확실히 전력이 상승해 있었다.
하지만, 관중동원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뛰어난 성적에도 문학구장을 찾는 SK 팬은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2005년 SK 스포츠단 CEO에 취임한 신영철 사장은 야구단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석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스포테인먼트 즉, ‘스포츠’에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하지 않으면 지금의 SK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얼마 뒤, ‘우리는 우승보다 두 배 관중이 좋다’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신 사장은 팀 성적 향상과 함께 관중 증가를 구단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꼴찌팀 관중은 구장을 찾지 않는 법. 신 사장은 ‘성적 향상’과 ‘관중 증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일본 프로야구 지바롯데 마린스를 방문했다가 만난 이가 김성근 감독이었다. 당시 김 감독은 지바롯데 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 사장은 김 감독의 해박한 야구이론과 풍부한 현장 경험을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에도 신 사장은 일본에 갈 때마다 김 감독을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2006년, 신 사장은 2군 전력 강화를 위해 김 감독을 SK 2군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조범현 1군 감독이 거부 의사를 나타내며 김 감독의 영입은 무산됐다. 그렇다고 신 사장이 김성근 카드를 완전히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2006년 SK의 4강행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신 사장은 아예 김 감독을 1군 감독 후보에 올려놨다.
그해 시즌이 끝나고 도쿄에서 김 감독을 만난 신 사장은 마지막 면접을 봤다. 당시 SK 감독 후보는 4명이었다. 당시 김 감독은 후보 4명 가운데 가장 박한 점수를 받고 있었다. 어느 구단 관계자는 신 사장에게 “김 감독은 SK가 추구하려는 스포테인먼트와는 정반대 지형에 있는 사람”이라며 “구단 마케팅에 매우 적대적인 감독”이라는 악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현실의 김 감독은 전혀 반대였다. 김 감독은 지바롯데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예로 들며 “발렌타인 감독은 비가 오는 날엔 귀가하지 않고 팬들을 위해 사인지에 사인을 한다”며 “나도 그런 감독이 되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신 사장은 순간 ‘김 감독은 스포테인먼트와는 적합하지 않다’는 악평을 뇌리에서 도려내며 정중하게 감독직을 제안했다. 김 감독도 흔쾌히 신 사장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요청엔 단서가 있었다. “다른 코치는 다 김 감독이 뽑아도 수석코치는 구단이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 감독은 “구단이 의중에 둔 수석코치가 있느냐”고 물었다. 신 사장은 “이만수 코치”라고 대답했다.
그즈음 이 코치는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훗날 신 사장은 “김 감독에게 성적을 맡기고, 이 코치에겐 흥행을 맡길 작정이었다”며 “냉혹한 이미지의 김 감독과 따뜻하고 열정적인 이 코치의 이미지를 잘 혼합하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얻으리라 판단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야구계에서 김 감독과 이 코치의 불협화음을 우려했지만, 신 사장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 2007년 4월 10일 SK 홈 개막전에서 시구를 한 김성근 감독이 포수를 맡은 이만수 수석코치와 악수하고 있다. |
신 사장의 판단이 맞은 듯했다. 2007년 SK는 시즌 초부터 1위를 내달렸다. 탄탄한 마운드와 그보다 더 탄탄한 타선을 바탕으로 SK는 나머지 7개 구단을 압도했다. 가장 큰 변화는 선수들의 자세였다.
당시 SK의 모 관계자는 “김 감독 부임 후, 베테랑 선수들의 플레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이유가 있었다. 김 감독은 혹독한 겨울 훈련을 보내며 이름값 위주로 움직이던 팀을 철저히 성과중심으로 변화시켰다. 아무리 고액 연봉자라도 플레이가 성실하지 않으면 주전에서 뺐고, 벤치 사인에 따르지 않는 선수는 중심타자라고 해도 바로 2군으로 내려 보냈다. 심지어는 팀의 최선참인 박경완이 1루까지 전력 질주하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고서 홈에서 1루까지 ‘15번씩 왕복 달리기’를 지시할 정도였다.
치열한 내부 경쟁과 정신개조를 통해 SK는 새로운 팀으로 거듭났다. 정규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오른 SK는 그 해 두산을 꺾고 대망의 첫 우승을 차지했다. 팀 성적뿐만이 아니었다. SK는 홈경기 총관중 65만 6426명을 기록하며, 인천 연고 구단으론 최초로 홈 관중 60만 명을 돌파했다.
2008년은 SK의 팀 성적과 스포테인먼트가 가장 정점에 달한 해였다. 이 해도 SK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000년대 들어 삼성과 함께 유일하게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한 팀이 됐다. 홈경기 총관중은 이제 70만 명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SK의 극적인 성공 이면엔 갈등의 불씨도 커가고 있었다. 바로 김 감독과 이 수석의 관계였다. 2007년부터 야구계엔 “이 수석이 차기 감독 보장을 받고 SK에 입단했다. SK가 김 감독과의 2년 계약을 끝내면 바로 이 수석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할 것”이란 설이 파다했다. 물론 SK는 “낭설”이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2007, 2008년 2년 연속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SK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 수석의 차기 감독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SK의 고위인사는 “이 수석에게 차기 감독 보장을 약속한 사실은 없다”면서도 “‘2년 뒤 당신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는 언질을 준 적은 있다”고 밝혔다. 다른 고위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문서로 약속한 적은 없어도 구두로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말을 한 바 있다”는 것이었다.
▲ 왼쪽부터 2007년과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SK. 김성근 감독이 박정권에게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
#김 감독 경질은 그룹의 결정
2008년까지 호흡을 잘 맞췄던 김성근·이만수 콤비는 2009년부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야구계엔 “김 감독의 재계약 시 이 수석의 차기 감독설이 불거지며 김 감독이 이 수석을 상당히 불편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2009년까지 김성근·이만수 콤비 체제는 계속 이어졌다. 정작 김 감독과 사이가 틀어진 건 구단 고위층이었다.
김 감독은 시즌 전부터 “팀을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구단의 지원이 미미하다. 구단이 FA 영입은 물론이려니와 트레이드에도 상당히 미온적”이라며 구단에 서운함을 나타냈다. 덧붙여 “구단 고위층이 성적보단 스포테인먼트에만 관심이 있다”며 “성적이 나지 않는 팀에 스포테인먼트가 가능하기나 하느냐”며 답답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구단이라고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SK 모 관계자는 “FA 영입보다 내부 자원을 활용하겠다는 건 구단의 일관된 방향이었다”며 “김 감독도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단은 오히려 “선수가 조금만 아파도 일본 유수의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하고, 스프링캠프 때도 유일하게 1·2군 선수단을 모두 이끌고 국외로 나가는 구단이 SK”라며 김 감독의 불만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김 감독과 구단의 갈등은 수면 아래서 이뤄졌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된 건 2010년이었다. 김 감독은 재차 “구단이 전력강화에 투자하지 않는다”며 “스카우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신인 유망주가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고 구단에 직격탄을 날렸다. 구단도 “우리 팀은 신인 선수를 비롯한 2군 관리도 모두 김 감독의 결정에 따른다”며 “1군에 젊은 선수가 없는 건 1군이 기존 선수들 중심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유망주가 기용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해명했다.
2010년 SK가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우승 축하연에서 그룹 최고위 관계자가 김 감독의 손을 잡으며 “김 감독도 나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됐으니 이젠 후진양성에 신경 쓰는 것이 좋겠다”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사실상 김 감독의 2선 후퇴를 권유하는 발언이었다. 잔칫날에 2선 후퇴 권유를 들은 김 감독은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까지 김 감독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SK그룹 관계자들도 2010년엔 정반대였다. “김 감독이 구단을 사유화하려 한다”며 “지금처럼 우승만 지향하고, 재미없는 야구를 계속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급기야 SK 고위인사가 김 감독에게 “우승해도 전혀 기쁘지 않다”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SK와 김 감독이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2011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에서 김 감독은 격앙된 목소리로 “어떻게 구단 최고위 인사가 감독에게 ‘우승해도 기쁘지 않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나보고 제 발로 구단을 나가란 소리가 아니냐”고 서운해 했다. 물론 구단도 서운하긴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이 프런트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며 “사장을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 감독이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측의 감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6월. 김 감독의 재계약 확정을 기정사실화하는 신문 기사가 나왔다. 때맞춰 SK그룹 차원에서 김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송영길 인천시장 측이 SK그룹에 김 감독의 재계약을 요청했다는 소문도 나왔다. 그룹과 연고지에서 김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면 제아무리 구단 고위층이라도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구단은 김 감독 재계약 확정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구단 대표인 신 사장 역시 김 감독에게 “7월 중순 올스타전에 맞춰 재계약을 확정하자”고 말했다가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을 논의하자”로 한발 물러났다. 김 감독은 신 사장에게 “과연 SK가 나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구단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김 감독이 8월 17일 전격 사퇴를 표명한 것도 SK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김 감독은 사퇴를 발표했지만, 잔여 시즌 동안엔 감독을 맡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사퇴는 했어도 올 시즌 목표는 정규 시즌 2위”라며 자신이 아직 SK 감독임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다 그룹과 인천시가 김 감독의 재계약을 바라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시즌 종료 후, 극적으로 사퇴를 철회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SK는 다음날 바로 김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그룹의 암묵적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SK그룹 관계자는 “구단으로부터 김 감독 경질 건을 보고받았다”며 “‘갑작스런 사퇴 발표로 구단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는 구단의 보고에 그룹도 동감을 나타냈기에 김 감독 경질이 최종 결정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만수 2군 감독의 1군 감독 선임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소문대로 ‘차기 감독설’을 시나리오대로 현실화한 것일까. 이 감독 선임건도 구단과 그룹의 합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감독은 정식 감독 계약을 맺지 못했다. 잔여 일정을 책임지는 감독대행직만 맡겨졌다. 내년 시즌 감독 유지도 아무런 확약을 받지 못했다. 이를 두고 SK 내부에서도 ‘시즌 종료 후, 구단이 이 감독대행마저 ‘팽’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