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이 흑산 바다를 만나고 '자산어보'를 완성한 지 208년. 과거에 비추어 오늘을 바라보는 우리 바다 흑산의 겨울 생명 이야기를 만나본다.
200여 년 전 손암 정약전이 그 먼바다 세상 끝의 섬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생을 사랑한 방법, 그것은 흑산에서 만난 무수한 바다 생명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총 226종(물고기 112종)의 바다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자산어보'가 탄생했다.
이는 조선 시대까지 우리 바다생물에 대한 저술 중 가장 많은 종을 나름의 분류법을 창안해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생태서이며 해양생물백과사전이다. 그러므로 정약전이 머물렀던 흑산은 '생명'의 관점에서 200년 전의 바다와 오늘의 바다를 비교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자산어보'는 생명의 기록이면서 시대의 기록이었다. 정약전이 이름을 불러주었던 흑산바다의 생명들을 UHD 영상으로 만난다.
모든 이름은 시를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문의 마지막에는 분명한 어조로 '시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널리 참조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는 집필 의도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0여 년 전 정약전이 세심한 관찰과 고증을 통해 불렀던 그 이름들을 오늘의 흑산 바다에서도 변함없이 다시 불러볼 수 있을까.
그동안 흑산 바다의 수중 세계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특성상 바닷속 부유물이 많고 조류가 거센 점이 수중촬영의 악조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환경스페셜 제작진은 사계절 중 흑산 바다의 물속이 가장 맑은 겨울철을 골라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알을 지키는 쥐노래미 수컷, 괴도라치의 영역 다툼, 참홍어의 위풍당당한 수중 모습, 상어들의 유영, 위장술의 귀재인 문어와 넙치, 말미잘의 사냥, 산호초와 모자반 군락, 잘피숲이 어우러진 바닷속의 망상어 무리와 불볼락 무리 등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생물들의 겨울 생태를 UHD 영상으로 담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20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청정하고 생명력 넘치는 수중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흑산 바다. '자산어보'는 물고기 112종을 포함해 갑각류, 연체동물, 환형동물, 강장동물, 해조류, 해초류, 바닷새 등 총 226종의 해양생물을 기록했다. 그중 이제 더 이상 흑산 바다에서 부르기 어려워진 이름들, 다른 곳으로 떠났거나 사라져간 생명들이 있다.
조기 파시, 고래 파시, 고등어 파시 등으로 연중 흥성거렸던 흑산도의 기억은 옛이야기가 돼 버렸다. '자산어보'에 기록된 명태나 준치 같은 한류성 어종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흑산 바다에서 겨울과 봄을 나던 참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대왕고래 등 대형 고래들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조선총독부가 포경기지를 설치했던 고래의 섬 흑산도에는 이제 슬픈 전설 같은 흔적들만 남아있다.
고래가 사라지고 조기와 청어, 명태가 떠난 흑산 바다에 '자산어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생명들이 출현하고 있다. 아열대 어종인 범돔, 파랑돔, 아홉동가리, 독가시치 등이 한겨울의 흑산 바다에서 발견됐고 역시 아열대와 열대 지역에 주로 살아가는 멸종위기종 왕관해마도 흑산도에서는 최초로 환경스페셜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런 한편으로 북극해 희귀종으로 극지방의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가는 심해말미잘인 펼친입주름말미잘이 흑산 바다에 서식하는 것도 최초로 확인됐다. 이전에 없었던 아열대 어종과 북극해 냉수성 희귀종이 동시에 출현하는 흑산바다.
이런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다는 변하고 있고 정약전은 후대 사람들이 '자산어보'를 계속 보완해주길 바랐다. 그 소망을 좇아 2022년 겨울 200여 년 전 정약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변화하고 있는 우리 바다 흑산의 겨울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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