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가입 추진으로 푸틴 자극 등 정치 초보 행보…전쟁 터지자 결사항전 외치며 ‘세계 지지’ 이끌어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 정세가 한 치 앞을 모르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43)이 ‘국민 영웅’으로 주목받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혹은 이름조차 몰랐던 그였기에 이런 관심은 더욱 놀랍다. 그가 이렇게 우크라이나 자국민들은 물론이요, 전 세계에서 지지를 받는 이유는 전쟁 포화 속에서 보여준 용기 있는 태도 때문이다. 러시아 침공 후 우크라이나를 떠나 몸을 피했을 거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조국에 남아서 결사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 이런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격려와 응원을 보냈고, 더 나아가 세계 정상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우리를 공격하면, 당신은 우리의 등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러시아 침공이 있기 불과 몇 시간 전,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전 세계인들 앞에서 이렇게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만약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호언장담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내뱉는 뻔한 허세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가 침공한 후에도 피신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는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몸을 피하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러시아가 수도 키예프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미국으로부터 피신할 것을 제의 받았을 때도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이제 시작됐다. 우리에겐 탈 것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측에서 “젤렌스키가 키예프를 탈출했다”는 허위 보도를 하기 시작하자 보란 듯이 직접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키예프 거리에 나가서 촬영한 ‘가짜들을 믿지 말라’는 제목의 셀카 영상 속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우리의 무기가 진실이고, 우리의 진실은 이곳이 우리의 땅, 우리의 조국, 우리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라면서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며칠 후에는 보좌진들과 함께 키예프 거리에서 촬영한 셀카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이 영상에서 그는 “국민 여러분, 당대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총리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여기에 있고, 시민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쳤다.
이런 그의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은 많았다. 과거 젤렌스키 대통령을 가리켜 ‘치명적일 정도로 평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올가 루덴코 '인디펜던트' 우크라이나판 편집장은 이 영상을 본 후 트위터에 “오늘날 그는 자신이 이끄는 국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역시 “세상에, 이 사람 정말 용감하군”이라며 놀라워했다.
사실 위기 속에서 보여준 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연설문을 읽는 그의 태도가 너무 강건해서 몇몇 통역사들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통역을 멈추기도 했다. ‘노보예 브레미야 뉴스’ 웹사이트의 편집장인 율리아 맥거피는 “솔직히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국정을 이끄는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났다”면서 “그런데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 전국민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모든 우크라이나인들이 대통령 주위로 결속하기 시작했다”며 놀라워 했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야리나 클류츠코프스카는 지난 2월 19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보여준 젤렌스키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시 연설문을 통해 “학교 운동장에 폭탄 분화구가 생기면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은 20세기의 실수를 잊은 걸까’ 여러분의 무관심은 당신을 공범으로 만든다”라며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클류츠코프스카는 “지금껏 우크라이나 지도자가 서방세계에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며 놀라워 했다. 그러면서도 클류츠코프스카는 “물론 그는 배우 출신이다. 나는 이게 그의 진짜 모습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어찌됐든 지금 효과는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무능한 지도자란 이미지에서 벗어나자 결국 유럽연합과 미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2월 24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영상으로 연결된 젤렌스키 대통령은 5분간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늘 제가 살아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운을 떼면서 “우리는 지금 유럽의 이상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런 그의 호소는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즉각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들어갔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사실 그간의 젤렌스키 대통령의 위상을 생각하면 놀라운 것이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는 사실 ‘초보 정치인’ ‘무능한 지도자’ ‘코미디언 출신’ 등등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코미디언 겸 배우 출신인 그는 정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선에 출마했고, 거짓말처럼 7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다. 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다를 바 없었다.
키예프국립경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7세 때부터 코미디언을 꿈꿨다. 주로 러시아 방송국에서 활동했으며, ‘크바르탈 95’라는 팀을 만들어 KVN TV 코미디쇼에 참가해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만화, TV 쇼 등을 제작하는 동일한 명칭의 제작사를 설립했다.
젤렌스키가 처음 대중들 사이에서 각인된 계기는 2006년 우크라이나판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하면서였다. 당시 인상적인 춤솜씨를 보여준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코믹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패딩턴’과 ‘패딩턴2’의 우크라이나어 더빙을 맡았는가 하면, 2010~2012년에는 TV 채널 ‘인테르’의 이사 겸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배우 인생의 진짜 전환점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국민의 종’을 통해 찾아왔다. 직접 주연 및 연출을 맡았던 이 정치풍자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에서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되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인 바실 페트로비치 홀로보로드코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부패한 우크라이나 정치권을 맹렬히 비난했고, 이 모습을 몰래 녹화한 학생이 동영상을 SNS(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인기가 치솟게 된다.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국정 운영을 하면서 좌충우돌을 겪게 된다는 내용이다.
놀라운 점은 이 드라마의 스토리가 현실 속에서 그대로 재현됐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지 3년 만인 2018년 3월, 젤렌스키는 ‘크바르탈 95’ 소속 제작진들과 함께 ‘국민의 종’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당을 창당했으며, 12월 31일 전격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대선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친러시아 성향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을 따돌리고 압승을 거뒀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2019년 3월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 인터뷰에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서 “전문적이고 제대로 된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싶다. 우크라이나 정치 기득권의 분위기와 특성을 최대한 바꾸고 싶다”고 밝혔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구태 정치를 타파하겠다고 외쳤던 젤렌스키는 5년 단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러시아와 분쟁하고 있는 동부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대화로 문제를 풀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정치 신인이자 아웃사이더인 그의 출마는 당시 파격을 넘어 비웃음을 샀다. 코미디언 출신이란 점이 부각되면서 무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실제 당선되자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조롱했다. 가령 영국의 BBC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 몇 달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현재 TV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할을 맡고 있는 한 남자를 진짜 다음 대통령으로 뽑아 놓았다”고 조롱했다.
정치 평론가들은 더 가혹했다. 우크라이나의 유명 작가인 옥사나 자부즈코는 “멍청한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해 이 모든 줄거리를 고안해낸 시나리오 작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고 혹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가 러시아 신흥재벌(올리가르히)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젤렌스키가 사기 및 돈세탁 혐의로 미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콜로모이스키의 통제를 받는 꼭두각시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취임 후에도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비록 ‘국민의 종’ 정당은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지만 지지율은 줄곧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잦은 말실수와 대중의 인기를 좇기에 급급한 정책을 남발하자 ‘아마추어’라며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령 부패와의 전쟁을 위해 내건 반올리가르히법은 일부에만 적용된다는 비난에 부딪쳤으며, 포로 교환과 민스크 합의로 알려진 평화 프로세스의 일부를 이행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렇다 할 돌파구는 결국 만들지 못했다. 또한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는 점도 비난 받았다. 이런 행보는 자칫 푸틴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기에 보다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밖에도 지난해 12월 미국 측이 러시아의 전면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을 당시 이 위협이 과장됐다며 일축했다는 점, 심지어 러시아 침공 직전에는 2024년까지 징병제를 폐지하도록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등 위기감이 결여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내각에 전문성이 부족한 측근들과 지인들을 임명했다는 점도 문제시 됐다. 가령 대통령실 보좌관, 수석비서관, 국가정보국 국장은 젤렌스키와 같이 일했던 방송계 사람이 맡았다. 국가정보국장에 ‘크바르탈 95’ 스튜디오의 대표감독이었던 이반 바카노프를 임명했는가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자신의 측근이자 프로듀서 출신인 안드리 예르막을 앉히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보좌관에는 TV 시리즈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세르히이 쉐피르가 임명됐다.
하지만 이런 내각 구성에 대해 항간에서는 기존의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이 워낙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데다 그간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기에 내놓은 고육지책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요컨대 기존 정치인들을 배제하다 보니 선택한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 러시아 침공이 발발한 후 나타난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의혹이 전혀 근거 없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전쟁이 시작되자 정부 요직을 맡은 젤렌스키의 측근들은 남아서 조국을 지키고 있는 반면, 친러 성향의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도피한 상태다.
이에 위기 속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말한 한 정치 전문가는 ‘가디언’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구하거나, 러시아를 변화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럽을 변화시키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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