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본능’으로 보수 리더 자리 굳혀…보좌군 다수 검·경 출신 인재풀 확장 숙제, “사적 인연 쓰지 마라” 조언도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윤 당선자가 결국 정치를 할 것이란 예측이 나올 때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제대로 도전도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후퇴했던 고건 전 국무총리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과거 대선 도전 역사에 이름이 올라있던 공직자 모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당선자는 지난해 3월 검찰총장 직을 중도 사퇴하면서 사실상 정치 입문을 결심한 뒤 같은 해 6월 말 속전속결로 정치 개시를 선언했다.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 당 내부 경쟁자들이 즐비한 마당에 조기에 제1야당으로 간다면 내부 화살 세례를 감당하지 못할 터여서 제3지대에 당분간 머무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왕 정치할 바에야 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겠다”면서 7월 말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 특유의 직진 본능을 정치에서도 보여줬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당내 경선에서 정치 대선배 홍준표 의원의 맹렬한 막판 추격을 따돌리고 제1야당 대선 후보가 된 윤 당선자는 행정 경험이 많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의 본선 승부에서도 박빙 승부 끝에 승리했다. 윤 당선자는 선거 기간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에서 상징되듯 강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남겼다.
대선 전 정가에선 윤 당선자가 설사 청와대 방향의 길이 막혔더라도 국회 쪽으로 향하는 길은 확실히 열어놨다는 분석이 나왔었다. 비록 낙선하더라도 보수 진영 맹주로서의 지위는 확실히 굳혀놨다는 뜻이었다. 이와 관련해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 홍준표 모델을 소환했다. 둘은 보수 진영 대선 주자로서 본선에서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대선 직후 당권을 즉각적으로 장악해나갔던 이력을 갖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낙선 이후에도 한나라당을 이끌었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1.6%포인트 차로 분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장 출마설, 종로 보궐선거 출마설, 총재 경선 출마설 등 다양한 복귀 시나리오가 주변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이런 말풍선을 연이어 띄워내며 당내에서 존재감을 유지하던 이 전 총재는 1998년 8월 전당대회에서 55.7%의 과반 득표로 신임 총재로 선출돼 2002년까지 당권을 지키며 그해 연말 대선에 재도전할 수 있었다.
홍준표 의원도 ‘이회창 모델’을 이어받았다. 홍 의원은 2017년 5월 대선에 출마, 문재인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불과 두 달 만에 치러진 7월 3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다. 홍 의원은 이듬해인 2018년 6월 13일, ‘홍준표 대표 체제’ 하에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참패하면서 당 대표직을 결국 사퇴했지만 ‘대선 패배 후 당권 즉각 장악’이라는 이회창 모델을 이어받은 보수 정치인으로 기록돼 있다. 선거 전 국민의힘 한 전직 3선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보수정당은 새 인물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 이런 점에서 기존 인물과 경로를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보수 성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과거 실패 후에도 즉시 복귀한 이회창 홍준표 모델이 생겨났다. 윤 후보는 청와대로 갈 것이다. 그러나 굳이 ‘만약에’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그가 대선에서 실패하더라도 당을 장악하고 직후 지방선거 등을 이끄는 국민의힘 간판으로서의 힘은 지속할 것이다. 윤 후보 말고 당 내부에 대안이 없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이회창 홍준표 모델을 윤 당선자에게 대입하기에는 정치 경력이나 당내 세력 격차가 너무 크다는 이유다. 국민의힘 한 현직 다선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는 김영삼 정부 아래에서 국무총리를 그만둔 뒤 물밑에서 상당 기간 정치 행보를 하면서 당에 세력이 많이 생겼고, 적이 더 많다는 얘기도 있지만 홍준표 의원도 다선 의원이어서 다져놓은 당 내부 세력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윤 후보는 대선 후보이긴 하지만 탄탄한 당내 세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윤 후보가 이회창 홍준표 모델을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점쳤다.
윤 당선자는 정치 입문 후 줄곧 공정과 상식을 외쳤다. 법과 원칙에 따라 앞만 보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이런 종류의 무거운 말보다 윤 당선자를 겪어본 국민의힘 현직 의원들의 공통적 평가는 “생각보다 검사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털털하고 격의 없는 표정과 태도로 다가오니 호감이 간다는 것이다. 당 내부에 우호 세력이 상당 부분 많이 형성돼 이미 지속 가능 권력이 됐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윤 당선자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 친구 경조사를 다 챙겼다는 얘기는 이미 알려졌고 그의 과거 이야기를 좀 더 모아보면 윤 당선자의 숨은 무기를 가늠할 수 있다. 9수를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사시에 합격, 검사가 된 윤 당선자의 첫 임지는 각종 대선 여론조사에서 그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보낸 것으로 집계되는 지역인 대구다. 그는 1994년 3월 14일부터 1996년 3월 1일까지 초임 검사로 대구지검에 근무했다.
서울이 고향인 윤 당선자는 대구에서 하숙을 했다.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하숙집 여주인 박정자 씨(81)와 남편 권병직 씨(81)는 당시의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박 씨는 “윤 검사를 우리가 2년 동안 겪었는데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인간으로서 가진 덕목은 거의 다 갖춘 사람이었다”며 “성격, 인성이 좋고 예의도 바르다. 부모 교육을 굉장히 잘 받았더라고. 인정도 있고 의리도 있고 하여튼 젊은 사람이 그렇게 원만했다”고 회상했다.
윤 당선자는 출근길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빠트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권 씨의 외벌이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못했는데, 윤 당선자는 1년에 한 번씩 중식당과 한정식집에 박 씨 부부를 데려가 식사도 대접했다고 한다.
박 씨는 “하숙생이 그런 사람이 어디 있노. 우리는 돈 다 받았는데”라며 “윤 검사가 퇴근하면서 전화로 나오라는데 우리 생전 처음으로 빙빙 식탁 돌리는 데를 갔지. 생각해 보니까 우리를 부모로 생각한 거지. 하숙집 아줌마가 아니고”라고 했다.
윤 당선자가 1996년 강릉지청에 발령받고 하숙집을 떠나던 순간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박 씨는 “나가는 날에 우리 내외가 너무 섭섭해가지고 이래 막 내다보는데 윤 검사가 선생님 잠깐만 앉으세요, 거실에. 이러는 거야. 왜 앉아있게 하노 하는데 갑자기 큰절을 넙죽 하는 거야”라며 “그러면서 우리한테 잡비까지 내놓고 가더라고.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감사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런 하숙생이 어디 있나 감동하지. 우리끼리 진짜 희한한 사람이라고 그랬어”라고 했다.
대구지검에 오래 근무한 한 수사관은 “윤 당선자는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둘러싼 항명 파동으로 중징계를 받고 대구고검으로 좌천됐을 때 얼굴도 잘 모르는 수사관들에게 수사를 잘해줘서 고맙다면서 자기 지갑을 열어 밥을 샀다”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배려할 줄 아는 성격이라 실패한 정치인이 될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당선자가 ‘큰 정치인 윤석열’로 가기 위해서는 고치고 다듬어야 할 부분도 적잖다는 게 정치권 인사들의 조언이다. 그의 주변에 검사나 경찰관 출신이 주력 보좌군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비판이 우선 나온다.
국민의힘 대선 선대본부 핵심 실세이자 본부장을 맡은 권영세 의원은 검사 출신이다. 그는 당 사무총장도 겸임하며 3·9 재보궐 선거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다. 원희룡 선대본부 정책본부장도 검사 출신이다. 상황실장은 경찰 출신 윤재옥 의원이다. 당 전략기획부총장인 이철규 의원도 경찰 출신이다. 검사와 경찰 등 수사기관 출신이 요직을 꿰찼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26년 동안 검사를 한 윤 당선자가 검찰이나 경찰 식의 확답형 보고서 문화에 익숙할 수밖에 없어 여전히 이런 사람들을 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한 토론보다는 A냐, B냐를 단숨에 결론짓는 데 익숙한 윤 당선자가 인재 등용에서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정치 원로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2월 2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윤 당선자에 대해 “사적 인연으로 인사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윤 후보가 대통령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가 불과 몇 달밖에 안 될 것이니 국정 전반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마 굉장히 힘들 것이다. 걱정스러운 건 본인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를 모르는 것 같다. 철저하게 공적으로 쓰겠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적재적소의 원칙으로 찾아보면 분야마다 소수라도 해당하는 인물들이 있다.”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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