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아이도 아빠 손잡고 ‘룰루랄라’…정상에서 3월의 설경 누리고 컵라면에 물 부으면 ‘딱’
산도녀는 최종 산행 목표로 한라산을 택했다. 하지만 3인방 가운데 정은지와 이선빈 같은 초보자가 처음부터 한라산에 오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첫 산행지로 태백산(관련기사 [‘산도녀’ 산행 따라잡기 ①] 눈 쌓인 태백산에선 ‘스패츠 필수’) 먼저 올랐다. 다음이 미니 한라산이라 불리는 어승생악이다.
어승생악은 ‘임금님에게 바치는 말’이란 의미의 ‘어승생’이라는 오름을 뜻한다. 제주에서 단일 분화구를 가진 오름 가운데 가장 높지만 한라산 등산로 중에선 가장 완만한 코스라 가족 단위나 초보자가 나들이하기에 좋은 오름이다.
어승생악은 어리목 입구에서 연결되는데 어리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왼쪽은 본격적인 한라산 어리목 코스, 오른쪽은 어승생악 오름이다. 자칫 한라산 표지석이 있는 큰 길을 따라 어리목 코스로 방향을 잡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한라산 등산길이 될 수도 있으니 좁게 난 어승생악 가는 길 쪽으로 길을 잘 찾아 들어야 한다.
어승생악은 한라산 능선은 아니지만 날씨와 체력 등으로 등반 제한이 많은 한라산을 대신해 누구나 가벼운 산행만으로도 한라산을 마주 바라보며 실컷 한라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오름이다. 한라산과 달리 탐방예약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어승생악은 1169m로 산도녀가 앞서 오른 1567m의 태백산보다는 훨씬 오르기도 쉽고 시간도 적게 걸린다. 왕복 1시간 남짓 거리로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태백산에 비하면 오르내리기가 훨씬 쉽다. 주차장에서 오름 정상까지 천천히 올라도 40분이면 닿는다.
게다가 어승생악 입구인 어리목 입구까지 자동차로 이동해 어느 정도의 고도까지 올라가 등산을 시작하기 때문에 1000m가 넘는 산이지만 ‘산린이(등산 초보자)’도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 등산객들은 어승생악을 ‘등산 경험 1도 없는 초보자라도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한라산 자락 등산코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봄이 성큼 다가선 3월 2일, 제주는 여기저기 봄기운으로 제법 살랑 거렸지만 어승생악 입구에 다다르자 콧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치고 들어온다. ‘아차차…여긴 아직 겨울이구나’. 어승생악 입구에는 아직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다. ‘산꾼도시여자들’ 3회에 나온 어승생악은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방송 제작 시기를 2월로 추정하면 아직 겨울이었고, 이제 3월이 됐으니 오름에도 봄이 왔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웬걸, 어승생악은 한라산 꼭대기처럼 아직 설경을 간직한 모습이다.
탐방안내소 직원은 “오름 곳곳에 아직 눈이 쌓여 있고 간혹 빙판도 있으니 올라가시려면 아이젠을 차야 합니다”라고 권고했지만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운동화를 신고 아이젠도 착용하지 않았다. 대부분 봄맞이 여행을 온 터라 아이젠을 휴대했을 리 만무하다.
‘술도녀’에서 ‘어리버리 소개팅남’으로 출연했던 배우 김지석은 ‘산도녀’ 3회에 게스트로 출연해 “설산은 처음”이라며 등산 장비숍에서 ‘설산 3종 세트’ 등산스틱, 아이젠, 스패츠를 대여했다. 평소 산행에 익숙하지 않다던 ‘산린이’ 김지석은 아이젠을 차고도 줄곧 눈길에서 삐끗거렸다.
눈 쌓인 어승생악을 보니 김지석처럼 설산 3종 세트를 대여해 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등산화는 신었고 등산스틱도 휴대했으니 일단 올라보기로 했다. 오름 올라가는 길에는 6~7세로 보이는 아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빠 손을 잡고 오르고 있다. 별 문제 없어 보인다.
사실 ‘산도녀’ 방송에선 어승생악이 꽤나 힘든 산으로 비친다. 산도녀 3인방이 종종 태백산 산행 때처럼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게스트로 출연한 김지석 역시 눈길과 오르막 오르기를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올라본 어승생악은 오르기에 그리 힘들지도 버겁지도 않았다. 약간의 계단과 급한 오르막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고, 눈길도 봄날에 차츰 녹고 있어서 발걸음을 조심하며 걸어가면 어려울 것 없는 산행이었다.
오르는 길에서 만난 한 등산객은 “‘방송국 놈들’ 믿을 수 없다더니, 이렇게 쉬운 오름을 어려운 등산길로 포장해 놓았다”며 웃는다. 아이젠을 착용했다면 날아다녔을 길인데 그나마 눈길을 조심조심 걷느라 속도가 나지 않아 오히려 덜 힘들다. 날씨는 포근한 반면 고도가 높고 사방에 눈이 있어 차가운 공기는 상쾌하다. 뽀득뽀득 눈 밟히는 소리도 듣기 좋다. 한겨울이 아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눈이라 더 반갑고 애틋하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쉬엄쉬엄, 어슬렁어슬렁 올라가도 금세 정상이다. 이렇게 금방 눈길이 끝나버리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그런 마음도 잠시, 눈에 들어온 정상의 풍경이 말 그대로 황홀하다. 스위스의 어느 산간인가, 잠시 헛갈린다.
어느 오름이나 비슷하겠지만 어승생악의 백미 역시 정상이다. ‘이렇게 쉽게 올랐는데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고?’ 의아할 정도다. 맞은편으로 한라산 정상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고 한라산 설경도 호젓이 누릴 수 있다. 윗세오름 등 주변의 오름들도 병풍처럼 펼쳐진다. 멀리 경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 가릴 것 하나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제주 초원 풍경도 덤이다.
탁 트인 시야와 눈앞에 자리한 한라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상에 올라 한참을 쉬고 나서도 내려갈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다. 보통은 제주의 오름에 오르면 정상 풍경이 아무리 멋져도 바람을 이기지 못해 금세 내려오곤 하는데, 이날은 마침 바람도 별로 불지 않고 오후 2시의 햇살도 따뜻하기만 하다. 정상부에 넓게 깔린 데크마당도 발길을 붙잡는 요소다. 앉을 데도 많고 누워도 좋다. 방송을 탔으니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사람도 그리 북적이지 않는다.
어승생악 정상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몇 개의 방어진지(벙커)도 보인다. 한라산에 가려진 서귀포 쪽을 제외하면 제주시 쪽을 백팔십도로 훤히 내려다볼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전략요충지는 없었겠다. 양쪽 끝에 놓인 망원경으로는 한라산 정상부도 가까이 볼 수 있다. 무료라서 더 좋다.
어승생악 정상을 이리저리 기웃거린 뒤엔 한라산이 잘 보이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김없이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는다. 너무 짧은 산행이라 빈 몸으로 와도 족하지만 정상에서의 라면 맛을 영 잊지 못해 기어이 물을 붓는다. 주변에서 ‘아, 나도 가져올걸!’ 괜한 탄식의 소리를 반찬 삼아 후루룩 라면을 마시듯 먹는다. 문득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정상에서 먹었던 컵라면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천상의 라면을 맛보기 위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술 시간’을 따라 하산한 산도녀 3인방을 마음으로 좇으며, 하산주를 마시기 위해 늦지 않게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선 시야가 더 넓어진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울라프’를 닮은 눈사람과도 놀다 온다. 3월의 눈사람과는 한바탕 사진도 찍고 눈밭에도 뒹굴거리다가 여한 없이 내려온다.
아이젠이 없다면 내려오는 길에선 더 조심해야 한다. 급경사에선 밧줄을 잡으며 내려올 수 있지만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자주 보였다. 눈 쌓인 3월의 어승생악을 오르내렸으니 믿거나 말거나 이제 ‘산도녀’처럼 한라산 등산 준비 끝!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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