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오른 한라산은 의외의 모습이다. 눈이 온 지도 한참 됐고 날씨도 확 풀려 정상 부근에나 가야 볼 줄 알았던 눈을 입구를 지나자마자 바로 만난다. 산도녀가 한겨울인 1월 21일에 올라 만났던 설산을 3월에 만나니 횡재한 듯 웃음부터 나온다.
한라산국립공원 직원은 “3월말까지는 한라산의 설경을 즐길 수 있어요.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눈이 녹으면서 길이 많이 미끄러워지죠. 지금은 춥지도 않고 설경도 즐길 수 있으니 한라산 등산하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라고 전한다. 산 중턱쯤부터는 아직 1m 가까이 눈이 쌓여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밟아 단단해진 눈길이 나 있다. 3월의 제주에선 봄날의 유채꽃과 한라산 설경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사실 울퉁불퉁한 현무암이 깔린 한라산 등산로는 경사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걷기에 꽤나 피로하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이번엔 현무암 위로 ‘눈 융단’을 깔아 놓아 걷는 길이 폭신하다. 그래서 한라산은 겨울 등산에 제격이다. 봄날에 만난 눈길은 슬슬 녹기 시작하면서 슬러시화 되어 질척거리기도 했지만 이미 사라져 버렸을 거라고 짐작한 눈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이 난다.
10~20분쯤 걷다가 바로 아이젠을 찼다. 아이젠을 차니 미끄러움이 가시고 걷기가 훨씬 편해진다. 사실 겨울 산행이 아니었던지라 아이젠을 미처 챙겨오지 않은 터였다. 혹시 몰라 제주에 도착해 공항 근처 렌털숍에 들러 아이젠을 5000원 주고 빌렸다. 제주공항 근처에는 등산용품과 캠핑용품을 빌려주는 렌털숍들이 있으니 혹시 깜박 잊고 가져오지 않은 물건들을 간단히 빌릴 수 있다.
등산화와 등산스틱, 스패츠, 아이젠 등을 빌려주고 등산양말과 무릎 보호대 등 간단한 등산용품도 살 수 있으니 장비가 없어 산행이 불가능하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등산화와 등산스틱, 아이젠을 모두 빌리는 데 2만 원가량 든다. 미리 예약하면 당일 등산코스 인근에서도 픽업하고 반납할 수 있다.
산도녀가 택한 성판악 코스를 따라 올랐다. 성판악 코스는 백록담을 보기 위해 초심자가 가장 많이 선택하는 코스다. 총 9.6km로 한라산 등산 코스 중 가장 길지만 난이도는 가장 낮다. 하지만 난이도가 낮아도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는 사실은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올 때 알게 된다.
또 한라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시간적 제약이 많이 따른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여타 국립공원들과는 달리 대피소에서 하루 묵어갈 수 있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라는 시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내려오다가 해가 져버리는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판악 입구부터 백록담까지 온전히 올라갔다 오려면 보통 9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산에 자주 다니는 ‘산꾼’들은 7~8시간 만에 올랐다 내려오기도 하지만 체력이 좀 약하면 10시간도 걸리고 중간중간 많이 쉬고 정상에서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11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산에 자주 다니지 않았던 여성의 경우라면 10시간이 걸리는 일은 예사다. ‘산도녀’는 백록담까지 오르는 데만 6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한라산국립공원 측에선 구간별로 통과 시간을 정해 놓았다. 성판악 입구에는 새벽 5시 30분부터 오전 8시 사이에 들어와야 하고 중간 기점인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오후 12시 30분까지 통과해야 하며 백록담에선 오후 2시 전에 하산해야 한다. 이 시간들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나혼자산다’에서 전현무도 대피소 통과 시간을 겨우겨우 맞추며 스릴(?) 있는 한라산 등산을 했다. 그래서 일단 한라산 등산을 결심한 사람들은 새벽에 길을 나선다. 새벽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 제약 때문에 오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되기 때문이다.
성판악 입구에서 첫 기점인 속밭대피소까지는 4.1km로 경사도가 거의 없는 평지 같은 트레킹 코스다. 1시간~1시간 20분가량 걸리는데 아직 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경사가 없다. 숲 산책을 하는 느낌으로 걷는다. 발에는 눈이 밟히고 옆으로 때죽나무와 서어나무가 반긴다. 여유가 넘친다.
속밭대피소에서 사라오름까지 1.7km는 처음엔 산책로를 걷듯 하다가 점차 경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사라오름부터 진달래밭대피소까지의 1.5km는 경사가 꽤 가파른 본격적인 등산 구간이다. 속밭대피소에서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1시간 30분~2시간가량 걸린다. 성판악 입구부터 진달래밭대피소까지 오는데 총 3시간가량이 걸렸다. 바람 없는 온화한 날씨와 폭신한 눈길 덕분인지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피로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등산객들은 보통 진달래밭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산도녀처럼 전투식량을 먹는 사람들도 있고 라면과 김밥을 먹기도 한다. 차가워진 김밥에는 뜨끈한 라면국물이 필수다. 빵과 커피, 오이와 당근 등 저마다 가져온 간식들을 모두 풀어놓고 소소한 산중 피크닉을 즐긴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까마귀들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가까운 곳에 앉아 ‘까악까악’ 음식을 내놓으라 종용하는가 하면 조용히 날아와 펼쳐 놓은 음식물을 낚아채 가기도 한다. 섣불리 음식물을 줬다가는 까마귀 떼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선 12시부터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12시 30분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통제하니 서둘러 올라가라는 안내다. 진달래밭대피소에 너무 늦게 도착하면 점심 먹을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단 정상으로 올라가 허기를 채워야 한다.
진달래밭대피소부터 백록담이 있는 한라산 정상까지가 가장 힘들다. 2.3km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그야말로 ‘빨간 맛’이다. 오르막과 막바지 계단이 숨을 몰아쉬게 하지만 점심을 먹었으니 힘을 내는 수밖에 없다. 산도녀 동행 게스트였던 배우 김지석은 오르는 내내 “나 할 수 있을까?” “산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여러분 인생은 속도가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맨 뒤에 간다고 해서, 뒤처져서 뒤에 가는 게 아닙니다” 등의 농담인지 명언인지 모를 말들을 무수히 쏟아내며 힘겹게 오르는 모습을 보였지만, 산도녀 멤버들은 그동안의 예행연습 덕분인지 정상까지 꽤 가볍게 올라갔다.
그리고 드디어,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마주한 산도녀 일행은 안개 하나 없이 맑게 갠 백록담의 신비로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정상의 환희를 즐겼다. 힘겹게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정상의 만족감과 뿌듯함을 함께 누린다.
산도녀는 없었지만 3월 8일 정상의 동지들과 함께 백록담을 즐겼다. 구름이나 안개, 미세먼지나 바람도 없는 맑은 날이다. 군데군데 아직 눈이 묻어 있는 백록담의 전경이 쨍하다. 반대편으로는 파란 하늘이 바다와 연결되고 밭들이 오밀조밀하다. 새해 첫날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지만 백록담 볼 일이 자주 있지 않으니 때 늦은 새해 소원도 빌어본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시각은 1시 30분, 정상을 누릴 수 있는 여유는 오직 30분뿐이다. 아쉽지만 내려갈 일만 남았다. 오르는 길은 길었지만 내려가는 길은 더 길 것이다. 사실 한라산은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다. 내리막이라 쉬울 거란 기대는 금물이다. ‘산도녀’에서는 어쩐지 내려오는 길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정상 부근에서 성판악 입구까지 물건이나 조난자를 내리는 모노레일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등산이란 오름만이 아니다. 하산까지가 등산이다. 내려오면서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나무, 그 꽃, 그 사람도 보고, 깜짝 수줍어하는 노루와 고라니도 만난다. 내려오는 길엔 그만 다리가 풀려 5시간이나 걸렸다. 한라산은 오를 때보다 내릴 때 더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날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심신이 온통 괴로울 때쯤 겨우 성판악 입구에 도착한다.
내려와서도 며칠 간 뻐근한 시간이 이어졌지만 제주에서 단 하루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한라산 등산을 선택할 것 같다. 게다가 3월은 따뜻하게 설산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시기다.
[팁] 백록담 보려면 한라산 탐방예약 필수
한라산에 오르려면 한라산탐방 예약시스템에서 온라인으로 미리 탐방예약을 해야 한다. 탐방예약을 하면 문자로 QR코드가 오고 한라산 입구에서 그 QR코드를 찍어야 입산이 가능하다. 성판악 코스는 1000명, 관음사 코스는 500명으로 하루 입산객을 제한하고 있다.
한라산 등산 코스는 모두 5개지만 정상인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 두 가지로, 이 두 코스로 오를 경우에만 탐방예약을 하면 된다.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을 거라면 탐방예약 없이도 어리목 코스와 영실 코스, 돈내코 코스를 이용해 윗세오름과 남벽분기점까지 오를 수 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