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C 다이노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경문 전 두산 감독. NC는 김경문 감독과 김성근 SK 전 감독을 놓고 고민하다가 신생팀 이미지에 맞게 좀 더 젊은 김경문 감독을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
NC초대 감독은 김경문과 김성근 전 SK 감독의 각축전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다른 전직 감독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론 한국시리즈 3회 우승 경력과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검증된 능력만 본다면 김성근이 단연 돋보였다. 김성근이 NC 이태일 사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것도 호재로 통했다.
그러나 NC는 최종 검토 과정에서 신생팀인 만큼 젊은 감독이 팀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김성근 감독이 6번이나 소속팀과 불화를 빚고 하차한 전력 때문에 NC가 부담스러워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NC는 두산 사령탑 시절 무명의 젊은 선수들을 스타급 선수로 이끈 김경문을 최종 낙점했다. 김경문은 50대 초반으로 아직 젊은 데다 경험도 풍부하다는 게 장점으로 꼽혔다.
NC는 9월 10일 예정된 선수단의 첫 가을 훈련부터 김경문에게 지휘봉을 맡길 참이다. 한 원로 야구인은 “두산 감독을 그만둔 지 3개월이 안 돼 다시 감독을 맡는다니 김경문이 천운을 타고나긴 한 모양”이라며 “시련 속에서도 저렇게 승승장구하는 야구인도 드물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련 속의 장돌뱅이 인생
김경문은 자신의 인생을 ‘장돌뱅이’로 비유한다. 그럴 만도 하다. 김경문은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 송림초등학교를 다녔다. 이때만 해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전학을 가며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그가 전학 간 학교는 초등 야구부로 유명했던 옥산초교였다. 그곳에서 처음 야구공을 잡은 김경문은 대구 경상중에 입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 간 뒤 혼자 자취를 하는 통에 야구를 포기하려 했다.
결국, 가족의 권유로 부산 동성중으로 학교를 옮겼다. 마침 동성중에도 야구부가 있어 그는 계속 야구선수로 뛸 수 있었다. 중학시절 포수로 가능성을 보인 김경문은 부산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마침 야구부를 창단한 공주고가 전학을 제안했다. 포수가 부족했던 공주고는 김경문에게 학비와 숙식제공을 약속했다.
김경문도 경쟁이 덜한 공주고에서 뛸 마음에 흔쾌히 전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1975년 대한야구협회에서 김경문을 ‘이중등록 선수’로 규정해 제재를 가한 것이다.
이때도 김경문은 야구를 포기하려 했다. 이중등록으로 선수 등록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김경문은 다시 야구공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야구인생 가운데 처음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1977년 고3 때 열린 대통령배대회에서 대회 MVP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결국, 고교 포수 랭킹 1위에 오른 김경문은 명문 사립대 고려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인천부터 시작해 대구와 부산, 공주 그리고 서울까지 갔으니 ‘장돌뱅이 인생’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경문은 고려대에 입학하자마자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돼 바로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고교시절의 가능성은 재현하지 못했다. 고3 때 포수 수비 도중 상대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머릴 맞았던 충격이 대학에 입학해서도 이어진 까닭이었다. 당시 김경문은 일주일 가까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김경문은 땀의 대가를 믿는 이였다. 노력으로 공포심을 이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OB 창단 멤버로 당당히 입단했다. 김영덕 OB 감독은 공 배합이 뛰어나고, 송구 능력이 좋은 김경문을 주전 포수로 기용했다.
하지만, 불운은 프로에서도 계속 됐다. 대학 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허리 통증이 재발한 것이다. 그는 진통제를 맞으며 경기에 출전했다. 덕분에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어도 1992년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산 감독 시절 김경문이 “아프다고 주저앉는 선수보다 아팠을 때 힘을 내는 선수가 더 오래 현역으로 뛴다”고 강조한 건 철저히 자신의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 지난 8월 25일 NC 다이노스 신인 지명선수 환영식에서 선수들이 직접 사인한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나성범, 노성호, 이민호, 박민우, 노진혁. 연합뉴스 |
현역에서 은퇴한 김경문은 2년간 미국 애틀랜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서 1994년 삼성 배터리 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사생활에 문제가 생기며 1996년 삼성을 나와야 했다. 그의 지인들은 이때를 “김경문 인생에서 최대 위기였다”고 표현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김경문은 2년 동안 자연인으로 지냈다. 그러던 1998년. 김인식 두산 감독은 후배 김경문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해 그를 한국으로 불러 배터리 코치를 맡겼다. 야구계로 돌아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김경문은 김인식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조용히 재기에 성공했다.
2003년 시즌 종료 뒤 김인식이 사퇴하며 두산은 신임 감독 선임을 두고 고심했다. 애초 카드는 선동열 삼성 수석코치였다. 그러나 “수석코치로 한대화”를 주장한 선 수석과 과거 한대화가 좋지 않은 모양새로 해태로 이적한 걸 기억하는 두산그룹 수뇌부의 이견으로 선 수석은 두산 감독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이때 권력의 공백기를 채운 이가 김경문이었다. 두산은 선수들이 친형처럼 따르고, 그날의 공 배합을 꼼꼼히 챙기는 김경문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두산 수뇌부가 김경문과 같은 고려대 출신인 것도 중요한 선임 배경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부터 두산 사령탑에 오른 김경문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팀을 빠르게 장악했다. 여기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거나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승부수를 던졌다.
대표적인 예가 2005년 양승호 수석코치의 2군 수비코치 발령 건이었다. 2004년 감독과 수석으로 콤비를 이뤘던 김경문과 양승호는 2005년 3월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갈등을 빚었다. 당시 김경문은 구단이 선택한 전지훈련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주변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는 게 이유였다. 코치 이전에 프런트로도 오랫동안 근무했던 양승호는 구단과 김경문 사이에 가교 역할을 담당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전지훈련에 피로가 쌓인 코치들이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양승호는 코치들에게 김경문과 관련한 재미난 일화를 들려줬다. 김경문을 헐뜯으려는 목적도 아니고 코치들의 긴장감을 덜어줄 요량이었다. 그 소리가 김경문의 귀에까지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후, 김경문은 숙소 옥상으로 양승호를 불렀다. 그리고 조용히 “앞으로 함께하기 어렵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양승호는 감독의 의지가 확고부동하다는 걸 깨닫고 다음날 귀국했다. 문제는 구단이었다. 양승호는 두산그룹 최고위층의 자제와 친구였다. 구단은 양승호의 좌천으로 그룹 최고위층이 역정을 낼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김경문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김경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사건을 잘 아는 모 야구인은 “김 감독이 구단에 ‘나와 양 수석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며 “결국, 구단이 김 감독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 냉정과 열정의 카리스마
김경문은 기자들 사이에선 ‘온화한 지도자’로 꼽혔다. 무슨 일이 터져도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심판에 항의할 때도 격렬하게 몸동작을 취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두산 선수들 사이에선 ‘호랑이 감독’으로 악명을 날렸다.
두산 모 선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번은 베테랑 선배가 구단과 재계약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감독님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이 성사되자 감독님이 그 선배에게 ‘전체 선수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 선배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두산에선 한때 ‘감독 눈에 찍히면 2군행’이란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많은 선수가 감독 눈에서 벗어나 2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선수들이 어째서 자신이 2군으로 내려가는지 도통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김경문이 2군행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선수 스스로 깨닫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전 내야수였던 모 선수는 갑자기 2군행을 통보받았다. 코치와 매니저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모른다”였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성실히 훈련만 했던 모 선수는 억울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선수가 이유를 들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경기 전 감독님이 더그아웃에서 글러브들을 보신 모양이다. 내 글러브가 다른 선수보다 더러웠던 모양이다. 코치님한테 ‘글러브 하나 제대로 닦지 않는 정신자세로 얼마나 야구를 잘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단다. 다음부턴 글러브를 광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부드러움 속에 칼이 숨어 있고, 칼이 숨은 와중에 부드러움을 지향했던 김경문은 두산 감독을 그만둘 때도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그의 승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승부수와는 다르다. 차라리 통보에 가깝다.
김경문이 두산 감독을 물러난 가장 큰 배경은 ‘임태훈-송지선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지며 팀 성적이 추락한 탓이었다. 그러나 일부 야구인은 “구단 사장과의 불편한 관계가 김경문의 자존심을 건드려 급기야 자진사퇴로 이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김경문은 구단 사장과 번번이 충돌을 빚었다. 김경문은 “구단이 투자를 전혀 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해냈고, 모 사장은 “언제 우리가 투자하지 않았느냐”고 반발했다. 김경문은 두산을 떠날 즈음 구단 고위관계자가 자신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소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퇴를 생각하던 김경문은 그 소릴 듣자마자 이틀 후 사표를 제출했다.
김경문을 오랫동안 보좌한 어느 야구인은 이렇게 말했다.
“김경문 감독이라면 NC가 단기간에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 감독에게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줄 필요가 있다. 두산 시절 김 감독은 거의 투자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승만을 강요당했다. 어쩌면 ‘승부수’라는 별명은 두산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김 감독의 생존전략이었는지 모른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친정 떠나자마자 새 살림 모양새 영~
“사전 각본에 따른 NC행 아니겠나.”
모 구단 단장은 김경문이 NC 감독에 선임되자 이미 예상한 결과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김경문이 지난 6월 두산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NC 측과 사전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많은 야구인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물론 NC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반박한다. NC 관계자는 “8월 초까지 우리는 초대 감독 선임을 천천히 준비했다. 구단 고위층이 야구인들을 광범위하게 만나며 초대 감독으로 누가 좋을지 의견을 청취했을 뿐 유력 후보군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다 8월 18일 김성근 SK 감독이 전격 경질되며 초대 감독 선임에 탄력이 붙었다. SK 팬들이 NC에 ‘김성근 감독을 초대감독으로 선임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야구계는 NC의 주장이 맞는다손 쳐도 “감독 발표 시기가 부적절했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6월 13일 감독을 제 발로 그만둔 사람이 불과 석 달도 안 돼 신생팀 감독으로 간다면 현재 두산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김경문이 떠나고서 두산은 하위권으로 처지며 한화, 넥센과 꼴찌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 야구해설가는 “복귀할 때 하더라도 정규 시즌이 끝나고 나서 복귀했더라면 모양새가 좋았을 것”이라며 “김 감독처럼 시즌 중 자진사퇴한 지도자가 바로 다른 구단 감독으로 가는 건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해설가는 “가뜩이나 구단이 계약기간 이전에 감독의 목을 날리는 판인데, 이젠 감독들마저 계약기간을 무시하고 마음에 맞는 구단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김경문의 NC 감독 선임 발표가 있던 날은 서울 송파구 ‘문 카페’가 개업하는 날이었다. ‘문 카페’는 김경문이 운영하는 카페로 알려졌다. 야구계 일부 인사들이 “NC에서 김 감독 카페 개업 날짜를 알고, 일부러 손님을 몰아주려고 발표한 것 같다”며 “카페 개업식 날에 감독 발표를 하면 야구인들 보고 ‘김 감독 앞으로 줄 서라’는 소리밖에 더 되느냐”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