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사면·기관장 인사 신경전 본격화…갈등 지속 땐 윤 당선인 국정 장악력 약화, 문 대통령 퇴임 후 안위 우려
“올 것이 왔다.” “정국 파장이 불가피하다.”
여야 관계자들은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무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분주하게 움직였다. 양측은 회동 무산에 대해 “실무 협의가 마무리되지 않았다”고만 했지만, 내부 곳곳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이번 회동의 실무 협의는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과 장제원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이 주도했다. 둘 역시 함구로 일관했다. 향후 추가적인 실무 협의 자체도 난항을 예고한 것이다. 여의도 안팎에선 “신구 권력의 회동 없이 새 정부가 출범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여야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 회동 무산 원인은 ‘의제’였다. 애초 청와대는 덕담 수준의 회동을 예상했지만, 한국은행 총재 인선과 이명박 전 대통령(MB) 특별사면(특사) 등의 문제가 수면 위로 급부상하면서 첫 만남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윤 당선인 인사들이 김오수 검찰총장을 향해 “거취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한 것도 뇌관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김 총장은 즉각 ‘법과 원칙’을 이유로 사퇴를 거부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공식 의제가 있는 회담처럼 돼 버렸다”고 윤 당선인 측을 비판했다. 친문(친문재인)인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사면이니, 인사 협조니 줄줄이 회동 조건을 달고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라며 “대단한 결례”라고 직격했다.
여권 한 인사는 “MB와 함께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의 동반 사면론이 나오면서 냉랭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친문(친문재인) 핵심인 김 전 지사를 놓고 사면 딜을 하자는 압박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여권 중진 노웅래 민주당 의원은 “음해성 주장”이라고 발끈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윤 당선인 측이 과한 의제를 던졌다”는 말이 나왔다. 윤 당선인 측은 회동 무산 직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일부 관계자들은 “청와대가 몽니를 부리고 있다” 등의 불만을 드러냈다.
신구 권력은 첫 회동 전부터 곳곳에서 충돌했다. 이들의 불편한 기류가 감지된 것은 3월 14일. 화약고는 윤 당선인 측의 ‘문재인 색 빼기’였다. 청와대와 윤 당선인 측은 공공기관장 인사를 비롯해 청와대 민정수석실 폐지 등을 놓고 대립각을 세웠다. 정치권 안팎에선 “윤 당선인이 인수위 초반부터 문 대통령과 차별화하면서 청와대에서 불편해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흘러나왔다. 특히 윤 당선인 측이 새 정부 출범 전까지 공기업 인사 동결을 문재인 정부 측에 요청하면서 양측의 기 싸움은 고조됐다.
명분은 윤 당선인 측이 쥐었다. 인수위 내부에선 “정권 말 인사 알박기는 적폐”라는 의견도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꼭 필요한 인사의 경우 함께 협의를 진행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업무 인수인계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며 “현 정부 안에서 필수 불가결한 인사가 진행돼야 할 사안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은 임기 동안 공기업을 비롯한 인사권에서 손을 떼라는 취지다. 정치 원로 인사도 “정권 이양기의 ‘인사 협의’는 통상적으로 ‘중지해 달라’는 의미”라고 했다.
청와대 반응은 싸늘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윤 당선인 측의 ‘협의 요청’을 언급, “모르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 임기는 5월 9일”, “(문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양측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폐지를 놓고도 날선 비판을 주고받았다. 청와대는 윤 당선인이 민정수석실 폐지 근거로 내건 ‘국민 신상털기’에 대해 “현 정부에서 하지 않았던 일을 폐지 근거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울산시장 선거공작 사건을 총괄 지휘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범죄 집단의 소굴”이라고 맞받아쳤다.
야권 인사들은 “여권으로선 청와대 권력분점은 물론, 문 대통령이 못한 청와대 집무실·관저 이전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게 뼈아플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문 대통령도 내건 공약이었지만, 대통령 안전 등의 문제를 이유로 청와대 경호처가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사실 ‘현재 권력의 레임덕’과 ‘예비 권력의 차별화’가 맞물린 권력 이양기 땐 어김없이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1987년 체제 이후 이 공식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헌정사상 첫 문민정부인 김영삼(YS) 정부는 취임 초부터 하나회 숙청을 비롯한 신군부 청산에 나섰다. YS는 신군부의 한 축인 민주정의당과 손을 맞잡았으나, 5·18 특별법 제정을 통해 12·12 쿠데타 세력에 칼을 꽂았다. 신군부 개혁은 YS 인수위 때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YS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기도 순탄치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도래하자, DJ는 경제청문회 문제를 놓고 YS 측과 충돌했다. 양측은 YS 차남 현철 씨 사면 문제를 둘러싸고도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다. 민주정부 2∼3기 이양기 때도 갈등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 대북송금 특별검사제(특검)를 전격 수용, DJ계의 반발을 샀다. 이명박(MB) 정부 출범 땐 신구 권력이 대통령 기록물을 놓고 정면충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출범 직후 MB의 친이(친이명박)계 공기업 알박기에 제동을 걸었다. 여야 관계 못지않게 앙숙 관계였던 이들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부터 루비콘강을 건넜다.
관전 포인트는 신구 권력 갈등의 종착지다. 최종 운명은 신구 권력 마찰의 부담을 ‘누가 더 지느냐’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일단 양측 모두 만만치 않은 정치적 부담을 질 전망이다. 통합과 협치 행보에 나선 윤 당선인은 당장 인수위 60일간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윤 당선인은 친문 패권주의는 비판했어도 문 대통령에 대해선 “우리 대통령님”이라며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실제 친문계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대선 기간 “문 대통령을 위해 윤석열을 찍자”는 말도 심심치 않게 올라왔었다. 이 와중에 터진 신구 권력 충돌은 반윤(반윤석열) 심리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20대 대선 득표율만 봐도 범진보층 득표율(이재명 전 민주당 후보 47.8%, 심상정 전 정의당 후보 2.4%)은 50.2%에 달한다. 윤 당선인의 48.6%보다 높다. 그만큼 윤 당선인을 비토하는 계층이 많다는 의미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당선 직후인 3월 10∼11일(미디어헤럴드 의뢰, 14일 공표, 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 참조)까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 당선인의 국정운영 전망에 대해 응답자의 52.7%만 ‘잘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MB 89.3%, 박근혜 전 대통령 64.45%, 문 대통령 74.8%보다 크게 낮은 수치다. 윤 당선인이 신구 권력 간 냉각기를 조기에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정 장악력이 급속히 빠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담이 큰 것은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신구 권력 갈등은 문 대통령의 ‘퇴임 후 정치적 안위’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대선 패배 후 ‘문재인 책임론’은 이미 여권 전체를 옭아맸다. 국민 여론이 현 정부에 등을 돌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도는 38.1%%로, 직전 조사보다 5.3%포인트 낮았다. 대선 패배로 문 대통령 지지도의 심리적 마지노선(40%)이 무너진 셈이다. ‘레임덕 없는 최초의 대통령 타이틀’을 끝까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지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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