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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부자학’을 강의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대개 단견적이고 초조해 한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젊은이는 젊은 대로 당장 부자가 못 되어 안달이다. 그들은 그런 점에서 이미 심리적으로 패배하고 있다. <일요신문> 지면을 통해 3개월여간 ‘신부자열전’을 연재해온 필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수없이 만나본 이 땅의 부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부자들은 그 자신이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들은 “교수님, 저는 그냥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돈 많이 벌리면 벌리는 대로, 적게 벌리면 적게 벌리는 대로 모으고 아끼고 쌓았을 뿐이죠. 그저 제가 잘 알고 할 수 있는 게 제 직업이니까, 열심히 일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고 말한다.
그렇다. ‘미인박명’이고 ‘재사단명’이라고, 돈 버는 방법에 ‘빠꼼이’가 되었다고 자부해서 전문적인 일이 아닌 곳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는 가지고 있는 원금조차 까먹는 일이 부지기수다. 부자가 되는 길 역시 의외로 단순하고 하나의 길밖에 없다. ‘시류에 현혹되지 말라.’ 이는 주식 투자의 원칙일 뿐 아니라 부자가 되는 황금률이다.
열심히 자기 길을 찾아 일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소중히 하는 것만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러면 독자 여러분은 항의할 것이다. “그거 다 아는 얘기 아니냐?”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게 아니고, 한다고 해서 다 하는 게 아니잖은가.
당나라의 재상인 한유가 어느 날 절을 찾아 대선사에게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대선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별거 없소.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시오”라고 했다. 한유가 실소를 터뜨리면서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라고 했더니 대선사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지만 천하의 공자님도 죽을 때까지 다 못할까 저어하며 살았던 가르침 아니오? 불교의 가르침도 이것에서 벗어나는 게 한마디도 없다오.”
인생은 유전(流轉)한다. 흐르고 흘러 진화한다는 얘기다. 다들 행복한 삶, 풍요로운 부자를 꿈꾸며 살아간다. 저명한 경제학자 매슬로우는 인생을 사는 데에 다섯 가지 욕구가 있다고 했다. 생리적 욕구, 안전에의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 존중에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생리적 욕구와,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안전에의 욕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고 잘 지내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 그와 함께 자신의 중요성과 의미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기 존중에의 욕구, 최종적으로는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했다.
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다섯 가지 욕구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풍부하게 충족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럭저럭 건실한 재벌 2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다섯 가지 욕구를 다 충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에게도 ‘왕자의 난’처럼 내부 권력 싸움 등으로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다섯 가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부자들이 여느 일반인들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인이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를 위해 돈을 벌고 쓴다면, 부자는 이 단계를 넘어 자기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있다. 즉 부자에는 엄연히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욕 먹는 부자와 존경받는 부자다.
그저 돈만 아는 수전노형 부자는 돈을 많이 모아도 어려웠을 때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의 욕구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다. 부자가 되었어도 여전히 마음이 빈곤한,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난한 심리에 사로잡혀 주변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안으로 닫힌 채 산다. 천민적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전형적인 부자다.
진짜 부자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자기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승화시킨 사람이다. 한마디로 멋진 부자로서 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의무 곧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쯤은 되어야 진정한 부자라고 말할 수 있다. 35세에 10억원을 벌든, 45세에 1백억원을 갖고 있든, 그 부를 제대로 쓰고 누려서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 부가 무슨 소용일까. 그런 부는 오래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옛말에 ‘만 명의 혀는 무쇠로 만든 담도 녹인다’고 했다. 부는 덕을 쌓으라고 준 하늘의 복이다. 그 복을 겸손하게 대중들과 누릴 때 하늘은 자꾸 채워주신다. 부자가 늘고 공동체가 살찌는 유일한 길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사회적 윤리가 바로 서는 것이다. 필자가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며 강의하고 주장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부자학은 부자라는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고 그 객관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부자란 누구이고, 어떻게 부자가 되고, 그 부자가 어떻게 살아가고, 가문을 만들고, 그 부가 이어져 가는 가를 분석한다. 부자는 부자가 사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적 흥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필자가 공부하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건실한 사회적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은 멋진 부자들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벌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제대로 쓸 줄 아는 부자, 곧 자본주의사회의 리더가 나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역사가 50년에 불과하다. 일천하기 때문에 멋진 부자상이 아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졸고를 15주 동안 연재하면서 필자가 늘 어려움에 봉착했던 부분이 이처럼 멋진 부자들을 찾기가 좀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멋진 부자를 꿈꾸기 바란다. 자녀에게도 멋진 부자가 되길 기원하라. 그런 당신이야말로 애국자다. 필자는 다시 이 땅의 멋진 부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독자 여러분과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부자도 모르는 부자학개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