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름달을 망원경으로 보았다. 오후 해질녘부터 해진 이후까지. 어쩌면 그렇게 큰 별이 허공에 걸려있을까? 과학적으로 인력이겠으나 인력은 개념일 뿐, 현실은 놀라움이었다. 해질녘 오렌지 빛이었다가 노란 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백색의 빛으로 변한 달은 신비 그 자체였다. 분화구까지 다 보이는데, 달에는 토끼도, 계수나무도 없구나, 어떠한 생명체도 살지 않는구나, 하며 실망하게 되는 게 아니라 우주는 거대한 생명이고, 거대한 신비구나, 하며 탄성을 지르게 된다. 우리가 생명이라 생각하는 개체적 생명만이 생명인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그 이후로는 더욱 흙도 바위도 마침내 바람도 생명이라고 믿게 됐다.
달의 여신은 아르테미스다. 지난 여름 터키에 갔을 때 에베소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았다. 세상에, 한때 그토록 번창했던 곳이 넓은 폐허로만 남다니! 남아있는 하나의 기둥만이 그 자리가 아르테미스 신전이었음을 증거한다. 아무리 대단한 종교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사라지면 신도 사라진다더니! 무상(無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신이 사라진 무상의 자리에서 신성을 느끼는 이 이율배반을 어찌할 것인가. 아무래도 신이 있고 신전이 있고 그 신전을 굳건히 지키는 교조적인 집단이 있으면 종교도 권력이 되어 신성도 답답하다.
달빛 아래 허물어진 옛 신전터에 풀벌레들이 운다. 허물어진 것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 자아가 완전히 허물어진 자리에서 보게 되는 것인지도. 아르테미스 신화는 전한다. 달빛 아래 아르테미스가 나타나면 초목이 춤을 춘다고. 나는 좋아한다. 시골에 가서 창문 열어놓고 잠드는 것을. 잠들기 전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어 보면 달밤에는 풀벌레들의 아카펠라가 어떠한 오케스트라보다도 장엄하다. 봄에는 개구리부터 시작해서 두꺼비가, 여름엔 매미가, 요즘엔 귀뚜라미가 노래한다. 그 소리들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소리에 빠져들다 보면 내 호흡까지도 느낀다. 그리고 알게 된다. 호흡하는 것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호흡 속에서 우리는 하나다.
호흡은 바람이다. 바람은 춤이다. 움직이는 생명은 모두 생명의 춤을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마티스의 그림 중에 <춤>이 있다. 그림은 단순하다. 마티스는 하늘과 땅과 춤추는 5명의 여인들을 그렸다. 색도 단순하다. 푸른 하늘, 녹색의 대지, 신명 속에 있는 땅색의 여인들이다. 마티스의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놀랐다. 서양 사람들도 강강술래를 정서를 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춤을 추고 있고 나도 하나의 춤으로 소멸되는 그 황홀한 느낌은 보편적인 것이다.
5명의 여인들이 무아지경 속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있다. 그들은 없고, 존재하는 것은 춤뿐이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춤을 춘다. 하늘이, 대지가, 햇살이, 바람이,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들이! 달빛 아래서 춤을 추고 싶다. 강강술래를 하고 싶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