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6명은 전원 중국 기사와 대결을 벌였다. 2연패를 노리는 신진서 9단은 리친청 9단을 가볍게 제압했다. 상대전적은 4승 5패로 뒤져 있었지만 그것은 과거의 전적일 뿐, 5년 5개월 만의 만남에서는 리친청이 신진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로써 신진서는 지난해 6월 8일부터 현재까지 외국 기사를 상대로 29연승을, 중국 기사를 상대로는 24연승을 이어갔다. 올해 국제대회에서도 7연승을 질주하고 있다.
#신진서 vs 커제 재격돌 확정
한중 랭킹 3위 간의 맞대결로 주목받은 변상일 9단과 구쯔하오 9단의 대결에서는 변상일이 승리했다. 어려운 바둑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초반 기선제압에 성공한 변상일은 단 한 번도 리드를 빼앗기지 않고 완승을 거뒀다.
지난해 초 열린 제25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이후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신민준 9단도 근 1년 만에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신민준은 무서운 기세로 중국랭킹 2위까지 치솟은 신예 강자 딩하오 9단을 상대로 불계승을 거두고 8강에 합류했다. 딩하오는 현 세계 1인자 신진서 9단이 “향후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꼽았던 실력파 기사. 하지만 신민준을 상대로는 자신이 지닌 강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은 이외에도 박정환 9단, 김지석 9단, 김명훈 8단이 8강 진입을 노렸으나 각각 리웨이칭 9단, 양딩신 9단, 커제 9단에게 역전패를 당하며 8강 고지를 밟지 못했다.
주최국 중국은 커제, 양딩신, 리웨이칭 9단과 함께 탕웨이싱 9단, 리쉬안하오 8단 등 5명이 8강에 올랐다. 하지만 이야마 유타, 이치리키 료 등 자국 내 강자들을 앞세워 상위 성적을 노렸던 일본은 16강전에서 사다 아쓰시 7단이 미위팅 9단을 꺾었을 뿐, 전원 16강전에서 탈락, 아쉬움을 남겼다.
16강전이 끝난 후 다시 추첨으로 정한 8강전 대진은 신진서 vs 커제, 변상일 vs 리웨이칭, 신민준 vs 탕웨이싱, 양딩신 vs 리쉬안하오의 대국으로 짜여졌다. 16강전에 이어 8강전에서도 한국 기사들은 모두 중국과 맞선다.
#사활이 걸린 연말 결전
8강 대진 중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최근 ‘치팅 논란’으로 세간의 관심을 불러 모은 신진서와 커제의 재격돌이다. 커제는 농심배가 끝난 후 AI(인공지능)를 이용한 신진서의 치팅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바로 이어진 세계대회에서 둘이 만나게 됐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
커제는 ‘지인의 전언’이란 단서를 달고 의혹을 제기했지만 국내는 물론 중국 내에서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선배기사 후야오위에게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공부에 더욱 전념하라”는 핀잔을 들었는가 하면, 지인의 전언이란 것도 사실관계가 왜곡돼 바둑도 지고 매너도 졌다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커제는 자신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최근에는 신진서와의 10번기를 언급하며 다시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커제는 중국 내 통신망 빌리빌리에서 “신진서와의 10번기가 성사된다면 반드시 응할 것이다. 하지만 판을 크게 키웠으면 좋겠다. 패하는 쪽은 상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자”며 새로운 제안을 하고 나섰다.
커제의 연이은 도발에도 신진서는 의연한 모습이다. 신진서는 최근 인터뷰에서 “커제 9단이 나를 자신과 같은 급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 내가 어렸을 때 백령배나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자신에게 졌던 풋내기로 여전히 생각하는 듯하다”면서 “(커제의 치팅 도발이) 화는 나지 않는다. 그저 빨리 이겨서 빚을 갚아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것이 커제에게 수차례 지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커제가 이창호 9단이나 박정환 9단처럼 겸손하게 말을 한다면 나도 응당 존중할 것이다”고 말했다.
신진서 역시 10번기는 조건만 맞는다면 언제든 응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10번기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신진서야 세계 1인자로서 자격이 충분하지만, 지금의 커제는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때문에 스폰서가 나설지 의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만일 10번기가 이뤄진다면 커제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딩하오 9단이나 왕싱하오 5단의 성장을 기다려 신진서와 한 번 겨룰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따라서 올해 하반기에 예정된 신진서와 커제의 춘란배 8강전은 커제로서는 기사생활의 사활이 걸린 일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과연 신진서가 커제의 도발을 확실히 잠재워버릴 것인지, 아니면 커제가 중국 바둑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인지, 세계바둑 최정상 간의 연말 대회전이 주목된다.
중국바둑협회가 주최하고 춘란그룹이 후원하는 제14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의 제한시간은 각자 2시간 30분에 1분 초읽기 5회, 덤 7집 반이 주어진다. 우승상금은 15만 달러(약 1억 8000만 원), 준우승 상금은 5만 달러(약 6000만 원)다.
[장면 1] 기상천외의 한 수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
흑 신진서 9단(한국) 백 리친청 9단(중국) 191수끝, 흑 불계승
우하 백△ 넉 점을 잡아 실리로는 흑이 앞서가는 장면. 백의 주력은 좌하 쪽이므로 이곳 절충이 승부의 키포인트인데 이때 떨어진 흑1이 기상천외한 신진서의 한 수. 보통은 백A로 받아 자충수라는 것인데,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장면도 1-1
백2는 당연한데 여기서 흑3의 끊음이 교묘한 응수타진. 백4에는 흑5가 3에 이은 콤비네이션이다. 백6·8이면 흑9·11이 멋진 수. 백은 다음 응수가 마땅치 않다. 백A라면 흑B의 회돌이가 기다린다.
#장면도 1-2
실전은 백2로 두었지만 이는 고육지책. 그러나 흑13까지 백 모양에서 멋지게 연결해 백의 손해가 크다. A의 끊음도 백은 신경이 쓰인다. 11…△
[장면 2] 대형 포도송이의 출현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
흑 딩하오 9단(중국) 백 신민준 9단(한국) 218수끝, 백 불계승
중앙에 나쁜 모양의 표본이라는 대형 포도송이(흑▲)가 출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공지능도 이 시점에서 백의 승률을 85%로 나타내고 있었다. 신민준 9단의 포도송이 유인책을 감상해보자.
#장면도 2-1
중앙에 어려운 전투가 발생한 장면. 흑은 1로 뻗어 좌우 백을 가르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런데 여기서 백2가 딩하오가 간과한 묘수. 이것도 보통은 자충의 형태라 악수지만 지금 장면에선 최선이었다. 흑3을 기다려 백4·6으로 준비완료. 이하는 외길수순으로 백18까지 꼼짝없이 흑이 걸려들었다. 13…4
[장면 3] 연결이 패착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
흑 구쯔하오 9단(중국) 백 변상일 9단(한국) 170수끝, 백 불계승
우변에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 여기서 당연해 보이는 흑1의 1선 연결이 패착이 됐다. 본래 우변은 흑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지만 백A~C가 전부 선수로 듣고 위쪽 백도 공격당할 형태가 아니라서 흑이 괴로운 국면이 돼버렸다.
#장면도 3-1
흑은 3점을 살릴 것이 아니라 버려야 했다. 흑1의 이음이 최선. 백2면 흑 3점은 잡히지만 5로 틀어막아 우상 모양이 두텁다. 하지만 백도 A로 붙여 준동하는 여지도 있어 피차 지금부터의 바둑이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