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꿈같은 1992년, 혹사 논란? 후회는 없다…앞으로도 롯데만 응원”
부산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한 1992년의 염종석은 개막전 엔트리부터 합류하며 35경기에 등판, 17승 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 127삼진을 기록하며 그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마저 휩쓸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30.2이닝을 소화하며 4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1.47로 우승의 주역이 됐다. 당시 기록한 WAR 8.40(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 스탯티즈 기준)은 KBO 40년 역사에서 역대 신인 최고로 남아있다. 같은 해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 서태지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던 염종석 현 동의과학대 감독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어봤다.
'야구의 도시'로 불리는 부산에 마지막 우승을 안긴 염종석은 30년이 흐른 현재 부산 소재 동의과학대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감독이 돼보니 너무 바쁘다"며 근황을 전했다. "선수들에게만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다. 행정도 봐야하고 선수들 보내려면 구단 스카우트들과도 관계를 쌓는 등 할일이 많다"는 것이다.
동의과학대는 2020년 12월 창단된 아직 새내기 티를 벗지 못한 팀이다. 그는 "학교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셔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입학을 희망하는 선수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프로 입단을 지망한다면 2년 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캠퍼스가 도심과 가까워 아이들이 선호하기도 한다. 앞으로 1년에 1~2명은 프로로 보내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이어 "신생팀이라 아직 전력이 강하진 않다. 그래도 작년 U리그에서 왕중왕전까지 진출했다. 첫 경기에서 졌지만"이라며 웃었다.
#꿈같은 시간 1992년
염 감독은 1992년을 떠올리며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스스로를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다지 각광받는 선수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부산고에서는 중요한 투수였지만 전국에서 '톱'을 달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우리 동기들 중에 '특급' 선수가 많지 않았나. 언론에서 고교 유망주를 꼽을 때 10명 안에 거론 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갑작스레 발을 들인 프로 무대였지만 염 감독은 곧장 활약을 이어갔다. 자신조차 예상치 못한 맹활약이었다. 그는 "패전처리만 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1군 합류도 장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정말 꿈같은 일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신인으로 남은 염 감독의 기록, 하지만 데뷔 무대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긴장을 너무 심하게 했다. 첫 경기 전 애국가를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소변이 나왔나 싶을 정도였다. 경기 전에는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헛구역질이 나와 한 시간 동안 변기를 끌어안고 있었다"며 웃었다. 프로 첫 등판에 나선 그는 2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됐다. 염 감독은 두 번째 경기부터 완투승을 하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적응이 빨리 됐다. 두 번째 경기부터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던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강병철 감독님과 이충순 투수코치님이 마음이 풀어지도록 해주셨다. 기술적인 부분 보다는 항상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다. 어린 투수를 올려놓고 속은 타들어가셨을지 몰라도 내 앞에서는 호탕하게 '괜찮아! 20점 줘도 강판 안 시킨다'라고 해주셨다. 그런데 첫 경기에선 4실점하니까 2회에 내리시더라(웃음)."
첫 승 이후의 활약은 알려진 대로다. 9승을 채울 때까지 모두 완투승을 기록했다. 한 시즌간 정규리그에서 완투승만 13회, 완봉승 2회였다. 200이닝을 넘게 소화했고 1985년부터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독식하던 평균자책점 부문에서도 1위에 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1500만 원을 받고 입단한 선수가 단숨에 최고 투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단기간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일종의 '관리'를 받은 것이 졸업 이후 잠재력을 폭발 시킨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봄에 너무 무리하게 등판을 하면서 팔이 아팠다. 2학년 내내 공을 던지지 못했고 3학년 때도 여름까지는 2이닝 정도만 등판하다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공을 던지지 못하던 시절 체력 훈련만 열심히 했다. 그래서 프로 1년 차에 좋은 모습 보이지 않았나 싶다."
#서태지 부럽지 않던 인기
특급 선수들이 대거 대학에 진학하던 시절, 고졸 신인 염종석의 활약에 부산은 자연스레 뜨거워졌다. 같은 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결성 됐기에 염 감독은 부산에서 '염태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부끄럽지만 가끔 그렇게 불렸다. 스포츠신문 1면에서도 염태지라는 문구가 나왔다"며 "시내 나가는 것은 포기해야했다. 사람이 몰리는 장소에서 누군가 한 명이 알아보기 시작하면 수십 명이 달려들었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를 도망치고 그때까지 쫓아오는 팬들이 있으면 불러서 사인을 해주고 그랬다"고 말했다.
부산의 야구 열기가 유독 뜨거운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올스타전을 앞둔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을 가장 기억이 남는 시리즈로 꼽았다. "라이벌 해태와의 경기였다. 그날따라 실책이 많이 나와서 자책점은 없었지만 6실점을 하면서 졌다. 당연히 팬들은 난리가 났다"며 "후문 쪽으로 돌아서 택시를 잡아탔는데 팬들에게 걸렸다. '염종석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100명 이상이 택시를 에워쌌다. 차가 상한다며 내리라던 기사님이 나를 알아보시고는 끝까지 지켜주시더라(웃음). 결국 내려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니 팬들도 얼른 길을 틔워주셨다. 그땐 그렇게 뜨거운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보낸 시즌, 우승 이후 그의 주가는 더욱 올라갔다.
"선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중요한 자리에 초대 되거나 놀러 다니시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가는 곳마다 '염종석은 안 왔냐'고 찾는다더라. 선배들이 다녀오시면 '너 인기 폭발이다, 다음에 같이 가자'고들 하시는데 결국 안 데려가시더라(웃음). 스무 살 막내다보니 연차가 나는 선배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영광의 우승을 차지한 이듬해 팀의 대우도 달라졌다. 신인 연봉 1200만 원을 받던 그는 3000만 원을 받게 됐다. 1000만 원의 우승 보너스도 함께였다. 그는 "지금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며 웃었다.
#1992년 이후, 혹사의 여파
리그를 평정한 염 감독의 활약은 1992년 이후 거짓말처럼 재현되지 못했다. 야구계는 1992년의 '혹사'가 그의 팔을 망가뜨렸다고 말한다.
"200이닝을 넘게 소화했지만 정규시즌까지는 괜찮았다. 그래도 5~6일을 쉬고 선발로 올라가는 어느 정도의 로테이션은 지켜졌다. 다만 그 휴식기간 사이 운영이 조금은 달랐다. 선발 올라갔다가 이틀까지는 공을 던지지 않고 체력훈련만 한다. 사흘째부터 불펜피칭을 들어가는데 이걸 하지 않고 구원등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고 지켜야하는 상황이 나오면 중간이나 마무리로 올라갔다. 그래서 1992시즌 기록에 구원승과 세이브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정규 시즌까지는 할 만했다."
결국 과부하는 포스트시즌에 발생했다. 당시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3위를 기록,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모두 거쳐야 했다. 신인투수 염종석은 팀의 포스트시즌 첫 경기부터 완봉승을 기록했다.
"준플레이오프 첫 게임에서 완봉승하고 3일 쉬고 4이닝 등판해 승리투수가 됐다. 또 3일 쉬고 완봉승, 하루 쉬고 3이닝 세이브를 하며 한국시리즈까지 갔다. 한국시리즈부터는 팔이 내 팔이 아니더라. 그래도 하루 쉬고 2이닝 소화하고 3일 쉬고 6이닝 승리투수가 됐다. 그때 팔이 많이 망가졌다."
염 감독의 팔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따금씩 문제를 일으키던 상황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핸드볼 선수로 활약하며 지역 대표로 나서는 등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때도 뼛조각 제거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1993시즌 10승 10패, 평균자책점 3.41을 기록한 그는 1994시즌부터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상황이었다. 내가 자진해서 군대 가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알려진 대로 부상과 수술이 반복됐다. 1992년의 특급 활약은 재현되지 못했다. 그는 "1995년 이후부터는 평범한 투수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스스로를 평가했다.
야구계에서 '혹사의 부작용'을 이야기 할 때면 언제나 염 감독의 이름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그에 대해 '팔과 우승을 바꿨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한다. 염 감독에게 되돌리고 싶은 시점은 없는지 물었다. 그는 1995년과 1999년을 꼽았다.
"1995년 12월, 1997년 12월, 1999년 12월에 수술을 했다. 95년과 99년의 수술이 치명적이었다. 두 번 다 시즌 전에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시즌 이후 수술을 진행했다. 결국 내 욕심이었다. 약 먹고 주사 맞아가면서 뛰었다. 가끔은 그때 빨리 수술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는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때 내가 몸을 사렸다고 해서 좋은 활약을 지속했다는 보장도 없다. 열심히 던졌기에 많은 사랑도 받았다.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며 웃었다.
#부산 레전드, 롯데 레전드
부산 태생인 그는 50년간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다. 17년간 선수로 롯데에서 활약했고 지도자 연수 이후 6년간 코치직을 지냈다. 감독 생활 또한 부산 소재 대학에어 이어나가고 있다.
롯데가 아닌 다른 유니폼을 입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시즌을 마치고 구단은 염종석에게 은퇴를 권했다. 통산 93승으로 '100승'에 대한 욕심이 있던 그는 이적을 고민했다. "노장이 됐는데 노장 감독님들이 계시던 SK(김성근), 한화(김인식)에서 연락이 왔다. 이적하려고 마음도 먹었는데 도저히 다른 유니폼 입고 사직 마운드에 오르는 게 상상이 안 되더라. 그대로 은퇴를 결심했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응원을 보내는 롯데 팬 중 한 명이다. 막을 올린 2022시즌, 그는 롯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모두가 롯데를 하위권으로 꼽는다. 99%의 전문가들이 9위 아니면 10위라고 하더라. 구단에 있는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6, 7위만 해도 성공이니까 부담 없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급 투수 출신이기에 유망주 투수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롯데 2년 차 투수 '김진욱'의 이름이 나왔다. "확실히 작년보다 좋아진 모습이다. 심하게 빠지던 볼들이 줄었다. 투구 코스가 많이 좁아졌다. 제구가 잡힌다는 의미다. 변화구도 날카로워졌다"며 "최준용은 이미 팀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가 됐다고 생각한다. 김원중, 박세웅 등 좋은 선수들이 많다. 전망이 밝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롯데 팬들의 염원은 '우승'이다. 1992년의 마지막 우승 이후 30년간 롯데는 우승에 실패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자리에서 계속 응원을 보낼 것이다. 롯데, 부산이라는 수식어를 빼면 염종석이라는 사람이 의미가 있겠나. 롯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웃음)."
부산=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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