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이닝 0출루 경기 불구 타선 불발로 대기록 무산…정민철·리오스 등도 눈앞에서 놓쳐
그날의 선발 투수가 퍼펙트게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면, 더그아웃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감독도, 코치도, 동료도 그 투수에게 말을 걸거나 격려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최고의 집중력과 최대의 능력을 끌어 모아 최선의 흐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이라는 단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투수 개인의 능력과 수비의 도움 외에도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프로야구 KBO리그 40년 역사에서 아직 퍼펙트게임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2011년 9월 17일 퓨처스(2군)리그 경기에서 롯데 자이언츠 이용훈이 딱 한 번 기록한 게 전부다. 올해는 정규시즌 개막전부터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목도할 기회가 찾아왔지만, 하늘이 돕지 않아 결국 무산됐다. 불혹의 한국 프로야구는 여전히 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이 탄생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완벽한 9이닝'으로 끝난 폰트의 도전
SSG 랜더스 외국인 투수 윌머 폰트(32)는 4월 2일 창원 NC파크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 정규시즌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 그리고 9이닝 동안 NC 타자 27명을 상대로 무피안타 무4사구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고, 1회부터 9회까지 모두 삼자범퇴였다. 유일한 위기가 있었다면, 1회 첫 타자 박건우와 승부. 한가운데 담장 바로 앞까지 날아가는 큼직한 장타성 타구를 맞았다. 그러나 '제2의 김강민'으로 불리는 SSG 중견수 최지훈이 펜스에 부딪히면서 공을 잡아냈다. 올 시즌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수비 도움으로 잡아낸 폰트는 이후 일사천리로 NC 타자들을 무너뜨렸다. 심지어 9회 2사 후 대타로 나온 마지막 타자 정진기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는 시속 150㎞ 강속구를 던졌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완벽한' 투구를 했다.
문제는 SSG 타선이 9회까지 단 1점도 뽑지 못했다는 거다. 한 투수의 퍼펙트게임 요건이 성립하려면 경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책임져야 하는데, SSG는 9회 초 공격에서도 점수를 내지 못해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폰트의 9이닝 투구 수는 104개. 평범한 경기였다면 고민 없이 불펜에 마운드를 넘기고 내려왔겠지만, 역사적인 퍼펙트 행진이 이어지던 상황이라 누구도 투수 교체 여부를 쉽게 판단하지 못했다.
심사숙고한 김원형 SSG 감독은 결국 폰트를 마운드에서 내리기로 결정했다. 9회가 끝난 뒤 폰트에게 다가가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고 권유했고, 폰트는 큰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감독은 이와 관련해 "폰트는 원래 90~95구를 던지기로 계획했다. 사실 9회에도 올라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워낙 잘 던져서 예정보다 10구 정도 더 소화한 것"이라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폰트가 무리한 거다. 아무리 중요한 순간이어도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경기가 시즌 첫 등판이라는 점도 폰트를 연장 10회에 올리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144경기 레이스를 막 시작한 상황에서 외국인 에이스가 첫 경기부터 '급발진'을 하면 팀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김 감독은 "폰트가 이미 4~5경기를 뛰고 어느 정도 몸이 올라왔다면 도전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로선 지난해 투수 파트에서 부상자가 많이 나왔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을 보고 싶었던 팬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내가 결정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판단했다"며 "폰트의 개막전 승리를 정말 축하한다. 눈부신 투구로 팀의 첫 승리에 기여해줬다"고 박수를 보냈다.
폰트는 그렇게 KBO리그 역대 첫 퍼펙트게임 대기록을 포기하고 사상 최초의 '정규이닝 퍼펙트 투구'라는 비공인 발자취를 남긴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경기 후 "팀이 이겨서 충분히 만족한다. 9회까지 점수를 못 낸 건 전혀 아쉽지 않고, 오히려 모두 좋은 수비를 보여준 것에 고맙다"고 야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또 "투구 수가 많아서 기록을 위한 연장 10회 등판을 욕심 내지는 않았다. 마음은 올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시즌 첫 등판이었고,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투구 수 100개를 한 번도 던지지 않았다. 부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SSG는 10회 초 4점을 뽑아 뒤늦게 리드를 잡은 뒤 10회 말 불펜 김택형을 기용해 4-0으로 개막전 승리를 신고했다. 김택형이 2사 후 NC 손아섭에게 볼넷을 내주면서 팀 퍼펙트게임도 무산됐지만, 삼진으로 경기를 끝내 팀 노히트노런은 완성했다.
#MLB는 23회, NPB는 15회
한국보다 프로야구 역사가 훨씬 긴 메이저리그(MLB)와 일본 프로야구(NPB)에서도 퍼펙트게임은 아주 희귀하다. 1876년 시작된 MLB에서 146년간 23번, 1936년 출범한 NPB에서 86년간 15번만 각각 나왔을 정도다. 가장 최근 기록도 1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2년 8월 15일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던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9이닝 12탈삼진 무실점으로 퍼펙트게임을 완성한 게 마지막이다. 일본에서는 1994년 5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키하라 히로미가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뒤 28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완벽한 경기가 아직 나오지 않은 한국에서는 한화 이글스 정민철이 1997년 5월 23일 대전 OB(현 두산) 베어스전에서 달성한 '무4사구 노히트노런'이 가장 퍼펙트게임에 근접했던 경기로 꼽힌다. 7회까지 OB 타자가 단 한 명도 출루하지 못한 상황에서 8회 정민철이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야구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민철은 당시 "공이 제발 자신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야수들의 간절함과 부담감이 등 뒤로 전해져 왔다"고 했다.
정민철은 8회 첫 타자를 무사히 잡아낸 뒤 다음 타자 심정수와 맞섰다. 볼카운트 1B-2S에서 심정수가 헛스윙을 했다. 삼진. 다만 정민철이 던진 공이 포수 사인과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게 변수였다. 바깥쪽 공을 기다리던 강인권은 몸쪽 높은 코스로 공이 오자 급히 미트 위치를 바꿨다. 그 미트에 맞은 공이 뒤로 흘러갔다. 그 사이 심정수는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1루를 밟았다. 안타와 볼넷 없이 퍼펙트게임이 깨진 것이다.
정민철은 그 후 남은 아웃카운트 5개를 추가 출루 없이 잡아냈다. 8회 중견수 대수비로 투입된 전상열이 9회 1사 후 이종민의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28명의 타자를 상대로 완성된, 역대 가장 '완벽한' 노히트노런이었다.
#9회 1사에 안타 맞은 리오스
두산 외국인 투수였던 다니엘 리오스는 퍼펙트게임까지 두 걸음을 남기고 아쉽게 뒤돌아선 전력이 있다. 그는 2007년 10월 3일 잠실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9회 1사까지 안타와 4사구를 한 개도 내주지 않고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8회까지만 해도 자칫 설레발로 일을 그르칠까 숨 죽이고 있던 두산 관계자들이 서서히 에이스의 대기록 축하 팡파르를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리오스는 퍼펙트게임까지 아웃카운트 두 개만 남긴 상황에서 현대 8번 타자로 나선 포수 강귀태에게 통한의 좌전 안타를 내줬다. 두산 벤치는 즉시 리오스를 더그아웃으로 불러들였고, 뒤 이어 등판한 마무리 투수 정재훈이 강귀태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리오스의 최종 성적은 8.1이닝 1피안타 무4사구 1실점으로 기록됐다.
리오스는 이와 관련해 "경기 전부터 컨디션이 매우 좋아서 직구 위주로 공격적으로 던지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1회에 현대 타자들이 직구를 잘 못 치는 모습을 보고 2~3회부터는 사실 퍼펙트게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며 "한국에서 퍼펙트게임이 아직 안 나왔다는 건 마운드를 내려올 때까지 몰랐다. 나 역시 프로에 와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기록을 달성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또 "투아웃을 남기고 깨진 건, 야구하면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주자가 1루에 나가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다음 타자는 병살타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 1개만 맞은 경기를 아쉬워 할 투수는 없다. 좋은 경험을 했다"고 담담한 소감을 남겼다.
강귀태는 이날 리오스의 초구에 기습번트를 시도하는 등 사상 첫 퍼펙트게임 희생양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경기 중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경기 후엔 지인들의 전화를 수십 통 받았다는 후문이다. 강귀태는 또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 소속이던 2010시즌엔 한화 류현진(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2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중단하는 안타를 때려내 '레코드 브레이커'라는 뜻밖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물론 이날 강귀태의 안타가 가장 반가웠을 사람은 따로 있다. 당시 9번 타자로 대기하고 있었던 황재균(현 KT 위즈)이다. 만약 강귀태마저 범타로 물러났다면, 황재균이 9회 2사 후 퍼펙트게임 달성 여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타자로 타석에 들어설 운명이었다. 황재균은 "내 타석이 오면 초구 직구에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며 "귀태 형이 안타를 못 쳐도 내가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사라져) 아쉽다"며 짐짓 웃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류현진도 LA 다저스 시절이던 2014년 5월 27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MLB 24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에 도전한 경험이 있다. MLB 2년 차 투수였던 그는 홈 구장 다저스타디움 마운드에서 7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지만, 8회 선두타자 토드 프레이저에게 좌월 2루타를 내주면서 아쉬움을 삼켰다. 퍼펙트게임과 노히터가 동시에 무산된 순간이었다. 일본인 투수인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2013년 4월 3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 첫 26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9회 2사 후 만난 마르빈 곤살레스에게 통한의 중전 안타를 맞아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채우지 못했다. MLB에서 퍼펙트게임을 해낸 아시아 출신 투수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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