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사에서 디지털 치료제 기업으로 변신…세계 최초 두경부 트레이닝 솔루션 공개 예정
#게임사에서 헬스케어 스타트업으로 변모
1990년대 초 고등학생이던 김일 서지컬마인드 대표는 ‘울티마 6편’을 접한 뒤 게임 개발자라는 꿈을 갖게 됐다. 14년간의 직장 생활이 1세대 게임사로 시작해 마무리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99~2011년은 엠게임을 다녔고, 2011~2013년은 한빛소프트 모회사 티쓰리(T3)엔터테인먼트에 재직했다. 사실 울티마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것은 김 대표뿐만이 아니다. 유저가 게임 속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샌드박스형 다중접속역할게임(MMORPG)의 첫 등장은 세계 게임의 큰 사건이었다. 지난 1998년 엔씨소프트가 국내 처음으로 내놓은 MMORPG 게임 리니지도 울티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정도다.
김일 대표의 꿈은 게임 스타트업 창립으로까지 이어졌다. 2013년 모바일 게임을 만들기 위해 매니아마인드를 설립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게임 시장의 패러다임이 PC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문제는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공격적으로 모바일 게임 전환에 나섰다는 점이다. 2011년 경영 위기를 겪은 넷마블은 모바일 게임 전환과 글로벌 서비스로의 확장을 본격화했다. 이에 2014년부터 매니아마인드는 VR을 활용한 게임 개발로 방향을 선회했고, 국내서 VR 게임 개발사 5개 중 하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일 대표는 “대기업들이 모바일 게임 시장에 빠르게 들어오면서 스타트업으로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며 “VR 기술을 활용한 게임 개발로 시선이 옮겨진 이유”이라고 말했다.
헬스케어 스타트업으로 방향 전환은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의료복지융합 기업 티움씨앤씨가 VR 의료 콘텐츠를 개발해달라고 매니아마인드에 요청하면서다. 2015년 김일 대표는 서지컬마인드 설립과 함께 VR과 생체신호를 활용한 중독 치료 솔루션을 개발해서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솔루션은 환자에게 VR 체험과 3D 입체영상 등을 통해 오감 자극을 이용하는 일종의 인지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한 예로 VR 고글을 착용한 알코올 중독 환자는 가상의 음주부터 숙취로 고통받아 구토하는 장면을 보면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일명 ‘혐오치료’다
서지컬마인드는 혐오치료 솔루션 개발에 성공을 거두면서 외연 확대에 나섰다. 하드웨어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6년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 개발에 착수한 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료기기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개발 6개월 차에서야 알게 됐다. 인허가를 위해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투입한다고 하더라도 건강보험 수가 반영이라는 걸림돌이 남았다. 의료 현장에서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의료기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지컬마인드는 ADHD 디지털 치료제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됐다.
김일 대표는 “국내 의료 현실을 전혀 모르고 개발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며 “당시 첫 개발에 실패하자 정말 방황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의료 소프트웨어 기업 포부
방황하던 중 우연히 만난 인연을 통해 피벗(방향전환)을 결정했다. 2016년 김일 대표는 녹십자그룹 경영진을 대상으로 VR이 가져올 의료 분야의 혁신을 주제로 세미나를 했다. 그곳에선 최윤석 대표의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DHP)를 만나게 됐다. DHP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국내 유일 투자회사다. 당시 김 대표는 최 대표를 만나 의료진을 대상으로 하는 VR 트레이닝 솔루션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개발에 착수하게 됐다. DHP는 매쉬업엔젤스와 함께 서지컬마인드의 첫 액셀러레이팅을 통해 시드 투자를 해주기도 했다.
김일 대표는 “최 대표를 만나면서 방황을 멈출 수 있었고, 의료기기 하드웨어가 아닌 VR 기반의 의료 시뮬레이션·트레이닝 솔루션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할 수 있었다”며 “DHP의 파트너이신 정지훈 교수님이 ‘의료 분야는 의미 있는 매출이 발생하려면 적어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니,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시면 됩니다’라고 해준 말씀 덕분에 성급하게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서지컬마인드는 2017년부터 윤상철 연세대 의대 안과학교실 교수와 함께 VR 백내장 수술 시뮬레이터를 개발 중이다. 수술 시뮬레이터는 실제 사람 눈의 구성 요소와 움직임을 완벽하게 구현해 1mm 이하 정밀도를 갖춘 시뮬레이션 도구다. VR 기술을 통해 각종 수술법 등을 훈련할 수 있다. 물리 시뮬레이션 부분에서 실제 사람과 유사한 수준으로 구현하기 위해 업데이트를 진행 중이다. 내년 VR 백내장 수술 시뮬레이터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18년에는 장현정·정용기 삼성창원병원 교수와 함께 VR이 결합된 승마기계 장비를 개발했다. 승마는 지체장애 아이들 재활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다.
올해 6월에는 두경부 트레이닝 솔루션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다. 이제까지는 의대생용 솔루션만 존재했지만, 전문가용 솔루션을 출시하는 것은 서지컬마인드가 전 세계 최초다. 앞서 2020년 한승호 대한해부학회 이사장, 오승민 오앤클리닉 원장, 문형진 비업의원 원장, 렁시마(Rungsima wanitphakdeedecha) 마히돌대학교 교수 등은 공동연구를 진행해 성형수술 분야에서 VR 기반 트레이닝 개발 및 평가를 주제로 SCI급 논문을 게재했다. 두경부 솔루션의 경쟁력을 논문으로 증명한 셈이다.
서지컬마인드는 향후 VR 트레이닝 전용 솔루션 등을 유료 서비스로 제공할 예정이다. 아마존, 어도비, 구글 등이 SW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한 후 업그레이드된 솔루션 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하는 사업 전략을 벤치마킹했다. 미용성형 의료기기 및 의약품 기업 에스테팜은 서지컬마인드 솔루션 첫 구독자다. 서지컬마인드 투자자인 보톡스 기업 휴젤과도 구독 관련해서 논의해나갈 예정이다.
김일 대표는 “솔루션이 국가 간, 지역 간, 병원 간 의료격차를 해소해 의료 분야 민주화로 이어지길 희망한다”며 “실제 수술로만 가능했던 의술 능력의 향상을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 교육·수술을 통해 의료사고 감소율이 38%에 달한다는 논문이 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의료교육 비용을 경감하면, 병원 의료사고 관련 비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지컬마인드는 3차원 가상세계를 말하는 ‘메타버스’ 기반의 원격 협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신촌세브란스(대장암). 이화여대 서울병원(유방암), 삼성서울병원(이비인후과) 등과 원격 협진 관련해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특히 신촌세브란스 홍종원 성형외과 교수와 이어진 박사팀, 대한극지의학회 등과 원격 협진 PoC(신기술 도입 전 성능 검증)를 진행 중이다. 서지컬마인드가 개발한 원격 협진은 AR(증강현실)과 VR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확장현실(XR·extended reality)을 통해서 이뤄진다. XR을 활용하면 전 세계 어디서든지 응급상황 발생 시 가상공간에서 치료법 등을 공유받을 수 있게 된다.
김일 대표는 “디지털 치료제 연구를 통해 의료 분야의 혁신을 이끌어내고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겠다. 특히 인류 전체의 의료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서비스들을 개발해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포지티브 규제들을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주고, 의료 분야에서 원격의료나 소프트웨어 중심의 의료기기가 수가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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