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덕수 회장. |
STX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 중단 발표는 시장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하이닉스가 워낙 대형 매물인 데다 세 번째 매각 시도이기 때문이다. 또 매각 과정에서 채권단과 인수 후보 기업 간 갈등, 채권단 내에서의 갈등, 유재한 전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의 사임 등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만큼 STX가 예전에 포기를 발표했던 다른 인수전 때와 분위기와 여파가 사뭇 달랐다.
지난 2007년 1조 400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아커야즈(현 STX유럽)를 인수한 것을 정점으로 강덕수 회장의 광폭 M&A 행진은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하라코산유럽(현 STX윈드파워)을 인수하기는 했지만 규모나 시장 영향력 면에서 이전과 비교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수보다는 인수 참여 의사를 내비치다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08년 대한통운 입찰에 참여했다가 고배를 마신 STX는 2008년 대우조선해양, 2010년 대우건설과 대한조선, 이번의 하이닉스까지…. 웬만한 대형 매물에 손대는 척하다 마지막에 발을 뺐다.
STX가 대형 매물에 입맛을 다신 까닭은 조선·해운업에 치우쳐 있는 그룹의 사업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해서다.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STX는 매번 중도 포기함으로써 사업다각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사업다각화를 원하면서 스스로 그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STX가 번번이 마지막에 인수 의지를 철회해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고 기업 신뢰도 하락을 자초한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STX는 기업 재무구조와 유동성 문제로 악성 루머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대형 M&A에 참여한다는 의사를 내비칠 때마다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STX 측은 이따금 “사업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인수하지 않겠다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검토할 만하다고만 말해도 즉각 반응해오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STX가 M&A에 참여한다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며 “또 마지막에 포기하겠지라는 의심부터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M&A에 대한 의사를 번복할 때마다 STX그룹 상장 계열사들의 주가가 요동친다는 것도 문제다. STX를 믿고 투자한 주주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대부분 대기업과 달리 기관과 외국인이 STX 관련주에 투자하기를 꺼린다”며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유동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문에다 M&A와 관련해 입장을 수시로 바꾸는 탓도 큰 것 같다”고 귀띔했다.
▲ 지난 1월 24일 열린 수출·투자·고용 확대를 위한 대기업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최태원 SK 회장이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러나 시장에서는 중동 국부펀드의 자금 조달이 차질을 빚은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세계경제 불확실성’과 ‘반도체 사업을 위한 지속적 투자 부담’은 하이닉스가 매물로 나올 때마다 불거진 문제다. 이것이 하이닉스가 지난 두 차례의 매각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새삼스레 그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인수를 포기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실사를 거치는 동안 STX 내부적으로 하이닉스 인수의 위험성이 부각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경영진 사이에서는 하이닉스 인수보다 차라리 리비아 재건 사업에 힘을 쏟는 게 더 좋다는 의견이 제기됐다고 한다.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인 강덕수 회장이 하이닉스 인수 추진을 지휘하는 이종철 부회장에게 보수적인 접근을 주문했다는 것. 중동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아 인수전에 뛰어들기 어려운 마당에 인수 리스크까지 부각됐으니, 마치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일각에서는 STX가 처음부터 ‘하이닉스 입찰 경쟁의 들러리’였다는 얘기도 파다하다. 하이닉스 인수는 진작부터 SK로 결정 나 있었다는 것. 정부나 채권단이나 지난 두 번 실패를 경험한 하이닉스 매각을 이번에는 꼭 성사시켜야 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매년 수조 원을 쏟아 부어야 하는 반도체사업을 탐내는 기업이 없었다. 더욱이 유럽 경제를 비롯해 글로벌 경기가 심상치 않은 마당에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사업을 욕심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신성장동력 확보’를 내세워 SK가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정유와 통신을 축으로 하는 내수 위주의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반도체를 필두로 수출 위주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포부였다.
SK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 선언은 시장을 당황케 만들기도 했다. 시너지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데다 정부의 기름값·통신비 압박, 최태원 회장의 선물 투자 실패, 검찰 수사, 국세청 세무조사 등 SK가 안팎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인수 주체인 SK텔레콤은 KT와 주파수 대역 입찰을 앞두고 있었고 4세대(G) 롱텀에볼루션(LTE) 투자에도 신경 써야 할 상황이었다.
이 같은 정황 때문에 SK가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SK와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것으로 현 정부와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는 얘기가 꽤 돌았다”며 “하이닉스는 이미 SK가 가져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SK 단독 입찰의 모양새를 띠면 2009년 효성 때처럼 특혜 논란이 불거질 우려가 있었다. 이에 강덕수 회장에게 유효 경쟁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강덕수 회장, 이희범 STX에너지 회장이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이 친분이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하이닉스 채권단이 툭하면 입장을 바꾸는 듯하고 급할 게 없다는 인상을 준 것이 이미 SK로 결정 났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SK텔레콤 측은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난 것이 없지 않느냐”며 “왜 그런 얘기들이 계속 나오지는 모르겠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우리와 정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더욱이 이 때문에 하이닉스를 인수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지금으로서는 SK의 단독입찰이 유력하다. 하이닉스 채권단이 10월 24일로 예정된 본입찰에 SK 외의 기업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와 증권가에서는 지금 같은 때 실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입찰에 참여할 기업이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SK텔레콤 측의 인수 의지는 현재 확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SK텔레콤 측은 “경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럴 때 빨리 주인을 찾아 투자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입찰안내서가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며 “채권단이 배포하는 안내서를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STX의 포기로 SK가 협상 과정에서 훨씬 유리하게 됐다고 보는 쪽도 있다. 더 이상 채권단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매각을 최우선 방안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채권단으로서도 고집을 피우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STX의 인수 추진 포기가 하이닉스 매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회사 돌아가는 게 수상해…’
SK텔레콤은 10월 1일 플랫폼 및 서비스부문을 떼어내 SK플래닛이라는 별도 법인을 설립한다. 분사 이유에 대해 회사 측은 “이동통신부문은 굉장히 보수적인 업무인 반면, 플랫폼과 서비스부문은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것으로 함께 있는 것보다는 따로 떼는 것이 효율적”이라며 “SK텔레콤뿐만 아니라 KT, LG유플러스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직원들의 반응은 다르다. “11조 원 매출 중 이동통신 비중이 10조 원인 캐시카우인데, 1조 원짜리 회사에 가고 싶은 직원이 누가 있겠느냐”는 분위기다. 회사 측은 3년 동안 동일한 처우를 보장하기로 하고 해당 직원들에게 이직 동의서를 받았다. 그러나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는 직원은 지방발령 등 불이익을 준다는 분위기가 파다했다.
이에 김봉호 노조위원장은 지난 7월 4일 임원실로 찾아가 “동의서 미작성 직원에 지방발령을 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따졌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맨 것으로 알려진다. 김 위원장은 자살 시도 직전 직원들에게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때만 해도 직원들은 김 위원장의 ‘책임을 지겠다’라는 말이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두 시간 뒤 노조위원장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얘길 듣고선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놀란 것은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회사 측은 지방발령 등 불이익이 전혀 없음을 약속했다. 추가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10% 깎았던 것도 원상복구하고 올해 채용할 신입사원들도 정상 연봉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간 받지 못했던 삭감액은 돌려받지 못한다. 2008년 당시 공기업 등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고연봉 기업들은 고통분담 차원에서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10~30%씩 깎아 사내갈등을 부르기도 했다.
업무 효율성을 이유로 드는 회사 측의 말과 달리 직원들이 분사를 구조조정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이 같은 사내 분위기가 누적돼 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올 9월 직원들은 씁쓸한 추석을 맞아야 했다. 지난해와 달리 BI(보너스 인센티브)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설과 추석에 나눠서 주던 것을 설 때 한꺼번에 준 것일 뿐”이라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직원들은 “설에 70, 추석에 30, 총 100을 주다가 설에 90만 준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분위기를 더 흉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연말 상여금이다. 회사 측은 매년 상여금 중 20~30%를 회사에 적립해 3년이 지난 뒤 4년차에 한꺼번에 돌려주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회사 측이 성과가 잘 나오면 전액을 돌려주고 성과가 미흡하면 일부 삭감될 수도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회사의 현금유동성이 나빠진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이다. 최소 천만원대의 성과급을 예상하고 자동차와 주택 구매 계획을 세운 직원들은 벌써부터 비상이 걸렸다.
SK그룹에서 이런 식으로 직원들의 급여를 회사가 ‘적립’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SK에너지(현 SK이노베이션)는 직원들의 월 급여 중 10%를 회사에 적립해 연말에 돌려주겠다고 한 바 있다. 이때는 금융위기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1년 뒤 유가가 30달러대(배럴당)에서 100달러대로 크게 올라 초과수익이 나서 적립한 것 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직원들을 더욱 불안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SK텔레콤의 하이닉스 인수전 참여다. 하이닉스 인수전에 STX그룹과 SK그룹이 경쟁했지만 최근 STX그룹이 발을 뺐다. 반도체 사업은 지속적으로 거액의 설비 투자가 병행되어야 하고, 또 반도체·휴대폰·가전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달리 하이닉스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반도체 사업 하나뿐이므로 시장 경기에 따라 회사가 휘청거릴 리스크가 존재한다.
통신사업은 경기와 상관없이 꾸준히 수익을 내는 사업이었는데, 하이닉스가 본 손실을 SK텔레콤이 메워줘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벌써부터 상여금을 적립한다고 나선 것을 보니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지 걱정이다”는 것이 직원들의 반응이다.
이인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