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연루 초대형 스캔들 노태우 정권 레임덕 앞당겨…2019년 실제 매매계약 ‘한국판 실리콘밸리’ 조성중
일요신문이 창간한 1992년은 제14대 대통령선거가 펼쳐진 해였다. 임기 마지막 해였던 당시 노태우 대통령 레임덕을 앞당긴 사건이 터졌다. 정보사 땅 사기사건이었다. 정치·사회·경제를 관통하는 대형 스캔들로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을 줬다. 이전까지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던 정보사 본청 위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민 머릿속에 각인됐다.
정보사 땅 사기사건 무대가 된 곳은 정보사 본청 일대 부지였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3동 1005-X 일대 4만 8000여 평에 달하는 부지다. 1970년 논과 밭이었던 임야를 수용해 군부대가 된 땅을 1992년 당시 정보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보안유지가 필수인 특수 임무를 맡은 정보사가 터를 잡고 있던 까닭에 강남 도심 한가운데 막다른 길이 존재하는 묘한 풍경이 연출됐다.
부지를 수용할 당시 땅 가격은 올해 기준으로 보면 헐값 수준이다. 군은 이 부지를 평당 약 800원에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3.3㎡(약 1평)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노른자 땅’이 당시엔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안성맞춤인 허허벌판이었던 셈이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정보사 부지는 점점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땅으로 변해갔다. 땅은 가만히 있는데, 도시가 팽창하면서 생긴 기현상이었다. 1987년엔 부동산업자들 사이에서 정보사 부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서울 주둔 군부대 지방 이전 원칙에 따라 수도방위사령부에 이어 정보사까지 이전 대상으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1991년 국무회의 의결까지 됐던 정보사 이전은 돌연 백지화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이 밝았다. 1992년 초부터 군인 출신 군무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김영호 씨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18기 출신으로 1988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군무원 2급으로 특채됐다. 합참 무기체계기획과장을 거쳐 군사시설정책과장으로 재직했다. 김 씨는 토지 브로커 일당과 사기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업과 민간인들에게 정보사 땅 불하를 알선하겠다고 했다. 불하란 국가나 공공단체가 사용이 끝났거나 불필요하게 된 토지나 건물을 국민에게 팔아 넘기는 것을 일컫는다.
김 씨는 기업과 민간인에게 정보사 땅 불하를 알선하는 목적으로 81억 5000만 원을 수령했다. 알선비와 불하 관련 계약금 명목으로 받은 돈이었다. 이 돈은 6개 은행에 분산입금됐고, 11차례 돈세탁 작업을 거쳤다. 그러던 중 군 합동조사단이 정보사 땅 사기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김 씨는 81억 5000만 원 중 10억 2000만 원을 챙겨 홍콩으로 도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나머지 돈을 정건중 씨에게 돌려줬다. 정 씨는 김영호 사기행각에 동참한 정씨 일가 핵심 인물이었다. 성무건설 회장이던 정건중 씨는 정보사 땅 알선사례비 및 계약금을 김 씨에게 지급한 뒤 특혜불하를 약속받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돈을 지급하는 역할은 정 씨의 형 정명우 씨가 맡았다. 계약서엔 국방부 장관 명의가 도용됐다.
정건중 씨는 아무 효력이 없는 불하 계약서를 근거로 대기업에 정보사 땅을 팔아넘기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파는 사람에겐 땅이 없고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구조의 사기 매매를 시도한 셈이다. 정 씨는 굴지의 대기업과 접촉해 정보사 땅을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대기업들은 ‘국유지는 국가와 계약을 해야 옳지 않겠냐’는 취지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정 씨가 제안한 정보사 땅 매매 제안에 귀가 솔깃한 기업이 있었다. 바로 제일생명이었다. 정 씨는 부동산 브로커들을 통해 사옥 부지 매입이 다급한 상황이었던 제일생명 측에 접근했다. 부동산 브로커 박삼화 씨는 윤 아무개 제일생명 상무에게 정건중 씨를 ‘정치권에 연이 많고 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철학박사’라고 소개했다. 정영진 성무건설 사장은 ‘자금 동원 능력이 뛰어난 사채업자’로 소개되며 동석했다.
정 씨 일가는 윤 상무에게 “유력 인사 도움으로 정보사 땅을 불하받게 됐다”면서 “그중 약 3000평을 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용도를 변경해 제일생명에 전매하겠다”는 제안을 건넸다. 이후 정 씨 일가는 예금 230억 원과 어음 430억 원 등 총 660억 원을 제일생명 측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윤 상무는 토지 매매 관련 약정을 6차례 갱신하는 과정에서 정보사 땅 관련 불하계약이 국방부와 이뤄지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1992년 윤 상무는 국방부 합동조사단에 사기사건 관련 제보를 했고, 조사단은 제보를 받은 당일 조사에 착수했다.
사기사건 시발점이 된 김 씨는 1992년 6월 11일 홍콩으로 도피했다. 김 씨는 홍콩에 10억 원을 두고 6월 19일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베이징 시내관광을 마친 김 씨는 6월 23일 창춘과 선양을 거쳐 북한 접경지역인 단둥지역으로 향했다. 단둥 압록강호텔에 투숙한 그는 압록강 철교 중간까지 걸어서 관광한 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행적을 두고 일각에선 김 씨가 월북을 기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검찰이 정보사 땅 사기사건 수사에 착수하면서 정씨 일가는 자수 의사를 밝혔다.
1993년 4월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정보사 땅 사기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기) 혐의로 김 씨에게 징역 10년, 벌금 5억 원, 추징금 20억 4600만 원을 선고했다. 정건중 씨를 비롯한 관련자 8명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2년을 들썩인 정보사 땅 사기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30년이 지난 2022년 정보사 부지는 다시 허허벌판이 됐다. 2013년 정보사가 경기도 안양으로 본청을 이전한 까닭이다. 2019년 MDM그룹이 이지스자산운용, 신한금융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정보사 부지 9만 1597㎡(약 2만 7000평)를 1조 956억 원에 매입했다. 정보사 땅 사기사건이 일어난 지 27년 만에 실제 계약이 체결된 셈이다.
정보사 부지는 향후 미래형 친환경 업무복합단지로 개발될 전망이다.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며 IT, 금융, 국제업무 시설을 비롯해 블록체인, 빅데이터, 바이오 등 첨단 연구시설 및 관련 기업 입주를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이 부지는 현재 ‘OO부대 토양오염정화 사업’을 명목으로 공사 중이었다. 전직 군 관계자는 “정보사 지하에 있던 시설을 정리하는 작업일 것”이라면서 “정보사 지하 시설에 얽힌 비화도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공사할 때 서초역에서 방배역까지 가는 구간을 정보사 지하 시설이 가로막고 있어 철로가 굽어진 모양으로 설계됐다”고 전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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