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액 가장 많은 두 기업 ‘종국성 미보장’ 이유로 거부…시민단체 불매운동에 나서
2022년 3월 말까지 정부에 신고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7685명이며 이 중 사망자는 1751명이다. 신고되지 않은 피해자들을 포함하면 전국 95만 명, 이 중 2만 명이 사망자로 추산된다.
대부분 피해자들은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애경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에 의하면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가 발생한 경우 해당 가습기살균제 사업자가 그 피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최소한 특별법에서 인정하는 피해자들은 배상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기업들은 피해자의 일부에 대해서만 배상했다.
옥시는 가습기살균제를 415만 개 판매했으며 신고 및 구제 인정된 피해자의 83%인 3580명이 옥시 제품 사용 피해자다. 하지만 옥시는 이 중 405명의 피해자에 대해서만 배상을 한 상태다. 애경의 가습기살균제는 두 번째로 많이 판매된 제품이다. 피해자의 27%, 1540명이 애경 가습기살균제로 피해를 입었지만 배상을 받은 피해자는 11명에 그쳤다.
2021년 10월 피해자들과 기업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적협의기구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출범했다. 조정위는 지난 3월 피해자와 기업의 의견을 수용해 피해조정안을 내놓았지만 옥시와 애경이 이를 거부하면서 피해구제 조정은 사실상 무산됐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옥시와 애경이 조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피해자들이 고통받는 시간은 늘어가고 있다.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안은주 씨는 폐 이식을 두 번이나 받았다. 경남 밀양의 한 학교에서 배구코치를 하던 그는 배구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건강했다. 3년 넘게 사용한 옥시 가습기살균제가 안 씨의 폐를 굳게 했다. 현재 언니인 안희주 씨가 경남 함안에서 서울로 주기적으로 올라와 간병을 한다. 안희주 씨는 “경남 함안에서 KTX 타고 서울에 한 달에 많게는 7~8번 동생 간병을 하러 온다”며 “동생이 기관지 절개를 해서 가정용 산소기로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3년 동안 말을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손으로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태종 씨의 아내 박영숙 씨는 13년의 투병 끝에 숨졌다. 김 씨는 “2008년 7월 아내가 숨을 못 쉬겠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폐가 너무 망가졌다고 했다”며 “2008년 입원해서 2020년까지 21번 입원하고 그중 16번을 중환자실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비 때문에 화물차 운전을 시작했다”며 “병원비가 한 번 들어가면 최대 1600만 원까지 나와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조정위는 개별 피해자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은 생존 피해자의 경우 연령·피해등급 등에 따라 최저 2500만 원에서 최고 5억 3500여만 원(간병비, 복수피해자 추가지원금 별도), 사망 피해자는 연령에 따라 최소 2억 원에서 최대 4억 원의 유족지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조정안을 마련했다. 피해가 인정되지 않은 단술 노출 확인자의 경우도 3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옥시와 애경은 조정금액의 60% 이상이 두 기업의 몫인 데다 종국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옥시 관계자는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이 조정안에 받아들여지면 추가 협의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애경 관계자는 “동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며 “조정안에 우리 쪽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애경산업은 제조사가 아닌 판매자의 위치여서 이를 반영해 분담금 비율이 조정됐으면 해 의견을 제시했다”며 “의견이 받아들여지면 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조정위는 분담금 비율을 관련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합의해 정리된 의견을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업들은 이마저도 자체협의가 어렵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또 옥시와 애경은 이번 보상으로 추후에 책임을 묻지 않는 종국성 보장이 조정안에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피해자들 입장은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확인된 피해자들의 건강상태가 악화될지도 모르는데 한 번의 보상으로 책임을 종결한다는 것은 책임 회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정위의 조정안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나 기업 한 쪽이라도 수용하지 않으면 무산된다. 대부분 피해자들은 조정안을 수용하자는 입장을 보인다. 10년이 넘게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워온 터라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8년 전 가습기살균제로 아내와 장모, 처남까지 떠나보낸 조병열 씨는 “기업들이 문제가 되는 제품을 팔았는데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며 “빨리 끝내고 싶다. 유족들이 다 지쳐있다”고 말했다. 그는 “큰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조정안 내용에 포함된 보상만큼이라도 받고 싶다”고 심정을 전했다.
옥시와 애경이 조정안을 거부하자 피해자들과 환경시민단체들은 옥시와 애경 제품 불매운동 캠페인에 나섰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가시적인 변화가 있을 때까지 불매운동 시위는 계속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소장은 “많은 문제가 얽혀 있지만 먼저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을 해야 한다”며 “조정안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옥시와 애경은 조정안에 동의해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유족 김태종 씨는 “조정안이 성립될 때까지 조정위가 계속 활동해줬으면 한다”며 “해당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지킬 수 있는 조정안이 법으로 제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정위 활동은 이달 말까지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합의 없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다. 지난 27일 조정위 등에 따르면 옥시와 애경은 조정위와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간 협의 자리에 불참한 채 조정위 활동 기한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조정위는 4월 29일 회의를 열어 활동 기한 연장 여부를 확정하기로 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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