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가’ 꽃밭을 짓밟고 함부로 꺾은 것일까. ‘누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표현이기에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록’(유퀴즈)에 출연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의미할 수도 있고, CJ ENM 고위층이나 CJ그룹 고위층이 제작진에 윤 당선인의 출연을 강요했다면 그들일 수 있다. 제작진에 출연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 김부겸 국무총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측일 수도 있다. 또한 ‘유퀴즈’ 홈페이지 게시판에 2만 개 넘는 항의성 글을 올린 네티즌, 혹은 시청자일 수도 있다.
#같은 정치인이라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참고 침묵해야 하나, 아니면 항변해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연예관계자들이 많다. 루머와 오해, 왜곡과 침소봉대가 난무하는 연예계에서 각종 논란이나 구설수에 휘말리는 연예인 소속사는 늘 이 문제를 고민한다. 참고 침묵하면 사태는 빨리 진화되지만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많아지는 부분에서 뒷맛이 개운치 않고, 진실을 밝히려 항변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확대되고 장기화될 수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인 만큼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tvN ‘유퀴즈’와 유재석 측의 결론은 ‘항변’으로 보인다.
논란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4월 20일 tvN ‘유퀴즈’에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정치인의 출연을 두고 ‘유퀴즈’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성 글이 쇄도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되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1년 전인 2021년 4월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이발사, 구두수선사, 조경담당자들의 출연을 ‘유퀴즈’ 제작진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어 2021년 10월 김부겸 국무총리가 단계적 일상회복과 코로나19 방역 등을 국민에게 설명하기 위해 ‘유퀴즈’ 출연을 검토했지만 제작진에 거절당했으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도 경기도지사 시절 ‘유퀴즈’에 출연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알려지면서 논란이 더욱 확산됐다.
먼저 대응을 시작한 곳은 유재석의 소속사 안테나로 4월 25일 공식 SNS(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소속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악의적인 비방, 성희롱, 허위사실 유포, 인신공격, 명예훼손 게시글과 악성 댓글에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할 것임을 알린다”며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내부적으로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악성 게시물 작성한 이들을 대상으로 법적 조치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안테나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유재석을 향한 유례없는 악성 댓글에 대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27일 방송된 ‘유퀴즈’ 151회 마지막 부분에서 제작진은 ‘나의 제작 일지’ 형식으로 내보낸 에필로그를 통해 “우리의 꽃밭을 짓밟거나 함부로 꺾지 말아 달라”는 강한 입장을 밝혔다.
‘유퀴즈’ 제작진은 ‘나의 제작 일지’ 첫 머리에서 ‘폭풍 같았던 지난 몇 주’라고 언급해 이번 글이 4월 13일 윤석열 당선인의 녹화가 이뤄지면서 불거진 논란 때문임을 암시했다. 이후 2018년 ‘유퀴즈’가 방송을 시작해 최근에 이르는 과정을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어느 소박한 집 마당에 가꿔놓은 작은 꽃밭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라서 날씨가 짓궂더라도 계절이 바뀌더라도 영혼을 다해 꽃피워 왔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선 유재석을 ‘자신의 시련 앞에서는 의연하지만 타인의 굴곡은 세심하게 연연하며 공감하고 헤아리는 사람, 매 순간이 진심이었던’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곤 가장 결정적인 메시지인 ‘우리의 꽃밭을 짓밟거나 함부로 꺾지 말아 달라고 우리의 꽃밭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것이라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제작진은 이 글을 쓴 이유를 ‘훗날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라고 밝혔다.
#엉뚱하게 유재석에게 옮겨 붙은 불씨
이번 논란의 최대 피해자는 유재석이다. ‘국민 MC’로 불릴 만큼 큰 사랑을 받아 온 유재석은 지금껏 별다른 논란이나 물의에 휘말린 일이 거의 없는 스타다.
현근택 전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MC로 존경을 받는 분이라면, 그 이전에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유재석 씨에게 묻고 싶다. 정치인 출연을 자제하려고 했던 것이 맞느냐”며 유재석에게 공개 질의를 했을 정도다.
그 이유는 제작진에게 있다. 청와대와 김부겸 국무총리 측, 그리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측이 하나같이 ‘유퀴즈’ 제작진이 “프로그램 진행자 유재석이 정치인 출연을 조심(내지는 부담)스러워한다”와 “프로그램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재석이 정치인 출연을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지만 방송 관계자들은 제작진이 곤란한 출연 제안을 거절하는 관례적인 핑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한 지상파 예능국 PD는 “방송가에선 곤란한 출연 제안을 거절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거절 사유가 기존 출연 스타급 연예인이 부담스러워하거나 껄끄러워한다는 답변”이라며 “물론 유재석 씨가 실제 정치인 출연을 부담스러워했을 수 있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거절했다기보단 제작진이 그렇게 핑계를 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례적인 거절 방식은 결국 진행자인 유재석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말았다.
방송가에선 ‘유퀴즈’ 제작진과 방송국 CJ ENM이 유재석 뒤에 숨어 버린 상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애초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에는 서울대 법대 선후배 관계이자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서 검사로 같이 근무했던 강호성 CJ ENM 대표이사와 윤석열 당선인의 인연이 부각되기도 했다. 이후 논란은 CJ ENM 고위층을 넘어 CJ그룹 고위층까지 확대됐고 ‘권언유착’이라는 민감한 단어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서히 논란이 유재석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정치인의 출연을 거절한 유재석이 윤 당선인의 출연만 받아들인 것 같은 분위기로 논란이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퀴즈’ 제작진은 ‘진행자는 출연자 섭외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입장으로 일관하다 방송을 통해 “짓밟거나 함부로 꺾지 말아 달라”는 일방적인 입장을, 그것도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내보낸 뒤 다시 발을 뺐다.
윤석열 당선인의 녹화 사실이 알려진 뒤 유재석과 조세호가 녹화 현장에 도착해서야 윤 당선인의 출연 사실을 알게 됐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실제 방송에서도 유재석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담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만이라도 제작진이 명확히 밝히면 유재석을 향한 비난 여론에 최소한의 방향성이 생길 수 있다. 정말 윤 당선인의 출연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면 유재석을 향한 비난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록’ 151회 에필로그 전문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2022년 4월 27일(수)
날씨 16℃
미세먼지 보통/강수확률 0%
폭풍 같았던
지난 몇 주를 보내고도
아무 일 아닌 듯
아무렇지 않은 듯
쳇바퀴에 그저 몸을 맡겨야만 하는
나의 제작 일지
2018년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에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길바닥의 보석 같은 인생을 찾아다니며 한껏 자유롭게 방랑하던 프로였다.
저 멀리 높은 곳의 별을 좇는 일보다
길모퉁이에서 반짝이는 진주 같은 삶을 보는 일이
참으로 행복했었다.
유퀴즈는 우리네 삶 그 자체였고
그대들의 희로애락은 곧
우리들의 블루스였다.
이 프로그램을 일궈 온
수많은 스태프, 작가, 피디들은
살면서 또 언제 이토록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써 내려가는
위대한 역사를 담을 수 있어서
어느 소박한 집 마당에 가꿔놓은
작은 꽃밭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라서
날씨가 짓궂더라도
계절이 바뀌더라도
영혼을 다해 꽃피워 왔다.
자신의 시련 앞에서는 의연하지만
타인의 굴곡은 세심하게 연연하며
공감하고 헤아리는 사람
매 순간이 진심이었던 유재석과
유재석을 더욱 유재석답게 만들어준 조세호
두 사람과 함께한 여행은
비록 시국의 풍파에 깎이기도 하면서
변화를 거듭해왔지만
사람을 대하는 우리들의 시선만큼은
목숨처럼 지키고 싶었다.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마주했을 땐
고뇌하고 성찰하고 아파했다.
다들 그러하겠지만
한주 한주 관성이 아닌 정성으로 일했다.
그렇기에
떳떳하게 외칠 수 있다.
우리의 꽃밭을
짓밟거나 함부로 꺾지 말아 달라고
우리의 꽃밭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것이라고
시간 지나면
알게 되겠지
훗날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제작진의 마음을 담아 쓴 일기장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김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