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연합뉴스 |
잡스는 생전에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고수했다. 그가 열정적이고 투지 넘치는 천재적인 사업가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CEO가 아닌 한 남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잡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런 비밀주의 전략은 애플의 신제품 출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제품 발표 당일 잡스가 호주머니에서, 또는 봉투에서 제품을 직접 꺼내들어 보이기 전까지 애플의 신제품은 절대로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고, 그는 무대 위에서의 이런 쇼맨십을 좋아했다.
이처럼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사업가로서 종종 독선적이고 엄격하며 때로는 거칠었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직선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이런 까닭에 종종 불쾌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일례로 지난 2006년 ESPN의 회장인 조지 보덴하이머와 잡스의 첫 만남이 그랬다. 디즈니 이사회 미팅 때 잡스를 처음 만났던 보덴하이머는 잡스에게 당시 ESPN이 삼성과 제휴해서 출시했던 ‘삼성 ACE’ 폰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스포츠뉴스와 정보를 휴대전화로 받아볼 수 있는 나름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하지만 잡스의 반응은 싸늘했다. 보덴하이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잡스는 단 한마디만 던진 채 돌아서 나가버렸다. “당신의 전화기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망할 놈의 아이디어 제품입니다.” 그리고 이런 잡스의 말은 옳았다. 이 제품은 얼마 후 보기 좋게 실패했다.
직설적이고 거칠긴 했지만 그의 이런 완벽주의는 애플에게는 오히려 독보다는 약이 됐다. 디자인부터 설계, 포장 패키지까지 애플의 모든 제품에 일일이 관여했던 그는 작은 부분까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쿠퍼티노 애플 본사의 구내식당 주방장까지 직접 뽑았을 정도였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애플의 성공 제품에는 모두 잡스의 아이디어와 감각이 속속들이 배어 있으며, 덕분에 잡스는 338개의 애플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특허왕’이 됐다.
사업가로서의 그가 독선적이고 엄격했다면 아버지, 남편 그리고 친구로서의 그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정감 넘치는 스타일이었다. 가족들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그는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사생활 보호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한 번은 <페어팩스 미디어>의 기자가 한 기사에서 그의 자녀들의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자 불같이 화를 내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이웃주민은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던 잡스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녀는 “아들을 보고 있던 잡스의 뺨에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가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스탠퍼드 비즈니스스쿨에서 만난 로렌느 파월과 1991년 결혼식을 올렸던 잡스는 현재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고 있다.
잡스의 이런 가족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입양아였던 잡스에게 가족이란 그런 의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5년 조앤느 심슨과 시리아계 아버지인 압둘파타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난 잡스는 생후 즉시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생모가 미혼모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며 입양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시키고자 했던 생모의 바람과 달리 잡스의 양부모였던 폴과 클라라 잡스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평범한 노동자계층 부부였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지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잡스는 “나중에 커서 대학에 꼭 보내겠다”는 양부모의 약속대로 오리건주 리드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비싼 학비에 대한 부담과 정규과목에 대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결국 한 학기만에 학교를 중퇴했다. 이에 대해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학의 연설문에서 “저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삶에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도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18개월 동안 평소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던 다른 과목들을 청강했고, 기숙사에 방을 구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친구의 기숙사방 바닥에 누워 잠을 자거나 빈 콜라병을 반납하고 받는 돈 5센트를 모아 끼니를 해결했다. 또한 쇼핑몰에서 캐릭터 분장을 하고 한 시간에 3달러를 버는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다시 실리콘밸리의 양부모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네 주변의 특성상 일찌감치 컴퓨터 엔지니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컴퓨터 천재’라고 불리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났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비디오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취직했던 잡스는 한때 불교에 심취해 인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1975년 잡스는 워즈니악과 함께 자신의 집 차고에서 컴퓨터 회사를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평소 잡스가 완벽한 과일이라고 생각했던 ‘애플’이라고 명명했다. 창업자금은 단돈 1000달러(약 118만 원)였으며, 당시만 해도 가정집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정용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회사의 목표였다.
▲ 왼쪽부터 고교 시절, 1984년 매킨토시 출시, 1986년 넥스트 창업, 1998년 아이맥 출시, 2011년 9월 27일 마지막으로 공개된 모습. |
그리고 1977년 출시된 한 단계 더 진화한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Ⅱ’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90년대 초반까지 15년 동안 꾸준히 팔렸던 ‘애플Ⅱ’는 애플이라는 회사를 대중에게 알리게 된 첫 번째 컴퓨터였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 전문 경영인이 필요해졌고, 이에 잡스는 80년대 초반 대대적으로 외부 인사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1983년 ‘펩시’의 유명 마케팅 담당자였던 존 스컬리에게 “설탕물을 파시겠습니까,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스컬리의 마음을 움직여 CEO에 앉혔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훗날 스컬리에 의해 되레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1984년 29세의 나이로 매킨토시 컴퓨터를 출시했던 잡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일약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매킨토시의 성공은 잡스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매킨토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컴퓨터, 즉 그래픽 환경을 제공하고 키보드 대신 마우스를 사용하는 최초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비싼 판매가격으로 인해 시장에서는 실패했고, 1985년 잡스는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사회가 잡스의 비전과 뜻이 맞지 않았던 스컬리를 지지하면서 그를 쫓아낸 것이다. 실업자가 된 잡스는 스스로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넥스트(NeXT)’라는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트트웨어 개발회사를 창업했던 그는 이곳에서 오늘날 아이폰 운영체제의 바탕이 되는 웹브라우저를 제공하는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싼 가격 때문에 다시 한 번 쓴맛을 봐야 했다.
같은 해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부터 컴퓨터그래픽영화회사를 인수한 잡스는 이 회사의 이름을 ‘픽사(Pixar)’로 개명했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CG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잡스의 선견지명은 적중했다. 1995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에는 CG 영화가 봇물을 이뤘다.
그리고 1997년 잡스는 자신의 고향, 즉 애플로 귀환했다. 당시 애플의 재정상태는 부도 직전에 몰려 있을 만큼 매우 열악했다. 가장 급선무는 투자를 받는 것이었다. 이에 잡스는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에게 투자를 요청했고, 이로써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를 겨우 살려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라고 외치면서 당시 진행 중이던 모든 제품과 프로젝트를 폐기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베이지색의 밋밋했던 애플 컴퓨터는 잡스의 마법으로 기존의 틀을 깨는 컬러풀한 색상의 제품으로 탈바꿈했다. 전 세계적으로 370만 대 이상이 팔려나간 1998년 ‘아이맥’의 성공은 잡스의 귀환을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애플 성공 신화의 초석이 됐다.
잡스의 전성시대는 2001년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발표와 함께 서서히 막이 올랐다. 애플 특유의 간편한 사용과 트레이드마크인 흰색의 심플한 디자인은 곧 애플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으며, ‘컴퓨터 회사가 웬 음악기기냐?’라는 비난과 조롱을 뒤엎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07년 아이폰과 2010년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잡스의 계속된 성공은 그를 소위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아이팟’의 성공은 음악을 사랑하는 잡스의 취향 덕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봅 딜런과 비틀스를 좋아했던 잡스에 대해 워즈니악은 “우리는 봅 딜런의 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주 먼 거리를 달려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2001년 조지 해리슨이 사망했을 때에는 애플 홈페이지에 해리슨을 추모하는 사진을 띄우기도 했다.
‘영웅’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바로 사생아 문제가 그랬다. 1978년 고교 시절 사귀었던 크리스앤 브레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리사의 존재를 부정했던 잡스는 법정에서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생부란 사실을 인정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리사는 아버지 잡스에 대해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10대 때 몇 차례 아버지의 초대를 받고 집에 찾아간 적이 있다. 또한 몇 년 동안 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면서 돈독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반면 잡스는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했다.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현재 카지노 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잔달리는 <더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저 차 한 잔만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말하면서 아들로부터 연락이 오길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잡스는 끝내 이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반해 잡스는 친부모가 훗날 결혼해서 낳은 자신의 여동생인 모나 심슨과는 가깝게 지냈으며, 심슨은 잡스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잡스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나 하드웨어 기술자는 아니었다. 반면에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미처 깨닫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비상한 재능이 그것이었다. 이로 인해 아이폰이 나왔고, 또 아이패드가 나왔다. 모두가 ‘아니오’라고 말할 때 언제나 자신 있게 한발 앞서갔던 그의 추진력과 혁신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애플 신화의 모태가 됐다.
하지만 어쩌면 애플의 신화를 설명하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르겠다. 잡스의 35년 지기인 래리 브릴리언트는 이렇게 말했다. “잡스를 정의내리는 특징은 그의 천재성도, 재능도, 성공도 아니다. 그의 (애플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잡스는 그의 일을 사랑했고, 자신이 만든 제품을 사랑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사랑을 약간의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표현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