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생 김하나 씨는 '워킹맘'이다. 자식 욕심 많은 엄마의 잔소리 덕에 악착같이 공부했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진급과 물려있어 새벽과 주말에 중국어 학원 다니고 야근하면서도 버텼고, 출산 후에도 복직을 선택했다. '엄마라는 믿을 구석'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딸의 전화 목소리만 듣고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엄마는 힘들다 얘기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셨다. 인천에서 수원까지 버스를 갈아타며 아이를 봐주러 오셨고 첫째는 그렇게 엄마 손에 의해 길러졌다.
엄마 생전의 유일한 당부는 '네 이름으로 살라'는 것. 누구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김하나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이다. 결혼 전 간호사였던 엄마는 세 아이를 키우며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꿈을 딸이 이뤄주길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첫 아이를 업어 키워주시던 어느 날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검사 결과 위암 재발 판정을 받았다. 아차 싶었지만 엄마의 남은 날은 많지 않았다. 평생 곁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엄마가 떠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둘째 욕심이 앞섰다.
둘째가 생겼다고 하면 엄마가 더 살고자 애착을 보이지 않으실까. 그런데 둘째 임신 소식에 엄마는 '엄마도 없이 일 하며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울 거냐'며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2021년 여름. '너를 만났다' 제작진은 세 번째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김하나 씨와 엄마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야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지 고민했다.
김하나 씨의 어머니 고(故) 유인애 씨는 결혼 해 세 아이를 낳고 세상 떠나는 그 날까지 40년을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내내 인천의 2층 집에서 사셨다. 엄마의 흔적과 추억으로 가득한 오래된 집. 그중에서도 엄마가 좋아하던 곳은 마당의 꽃밭이었다.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사루비아)가 만발하던 '그림 같은 집'. 매년 5월이면 김하나 씨 가족은 엄마가 정성스레 가꾸던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엄마 떠나시자 돌보는 사람 없는 꽃밭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너를 만났다' 제작진은 VR 공간에 황폐해진 엄마의 꽃밭을 복원시켜 김하나 씨와의 첫 번째 만남의 장소로 삼고 거기서 엄마와의 소소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을 체험하도록 구성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그네가 삐걱거리고, 세 아이가 키우던 강아지 '나나'가 뛰어놀고, 장독대 아래로 엄마가 빨아놓은 이불이 널려 있는 엄마의 공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부모님 모시고 세 아이 키우며 대가족 살림을 꾸려왔던 김하나 씨의 어머니는 돈 100원도 허투루 쓰지 않을 만큼 알뜰하게 사셨다.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이 사시면서도 가족 먼저 챙기던 전형적인 우리네 엄마였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건만 어느 순간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얼굴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이고, 엄마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뒤늦게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제작진은 돌아가실 무렵의 나이 든 엄마 모습은 물론 앨범 속 젊은 날의 고(故) 유인애 씨와 딸 김하나 씨가 자매처럼 닮은 모습에 착안해 VR 공간에서 '젊은 엄마와의 만남'을 더불어 준비했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가상이기에 가능한 시간을 역행하는 극적인 만남. 현재의 자신보다 더 젊은 엄마, 친구 같고 자매 같은 엄마를 만난 딸 김하나 씨의 반응은 어땠을까.
엄마는 공기와 같아서 그 있음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 엄마가 떠나시고 나서야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엄마가 계시지 않는 친정 인천 집은 더 이상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고 두 아이 육아에 지치고 일이 힘든 날이면 엄마가 차려주는 밥 생각이 간절하지만 더는 먹을 수 없음을 안다.
무엇보다 엄마가 떠나신 봄날이 되면 '이 좋은 날 우리 엄마만 없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무너진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차오를 때면 엄마가 계신 추모공원을 찾듯 엄마를 만나러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VR 스튜디오에 들어선 김하나 씨. 엄마가 떠나신 후 태어난 둘째를 엄마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다는 김하나 씨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난 3년간 꾹꾹 눌러 참아 온 김하나 씨의 애끊는 사모곡(思母曲)이 울려 퍼진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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