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재발굴단에 바둑에선 김은지라는 여덟 살 천재소녀가 소개됐다. 김은지는 영재발굴단 초창기인 2015년 SBS 설 특집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에 소개됐던 김은지는 그 후 5년을 더 갈고닦은 끝에 13세이던 2020년 1월 마침내 염원하던 프로기사가 됐다.
프로가 되고 나서 시련도 있었지만 1년 만에 다시 바둑판으로 돌아온 김은지의 최근 페이스가 놀랍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선발전 결선 무대에서 조승아, 박지연, 오정아 등 막강한 선배들과의 더블리그에서 6전 전승을 거두고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국가대표 동료들은 여자랭킹 1~3위인 최정, 오유진, 김채영이다.
NH여자바둑리그에서는 선수 선발식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지명권을 가진 모든 팀들이 김은지를 주장으로 뽑기를 원했다. 추첨 결과 지명권을 얻은 섬섬여수팀 이현욱 감독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김은지의 이름을 호명했다. 여자바둑리그 사상 최연소 1지명이었다.
여자들만의 무대에서 활약한 건 아니다. 후원사 시드를 받아 출전한 YK건기배에서는 세계 챔프 신진서를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패하긴 했지만 중반 어느 시점에선 앞서가는 모습도 보여 관계자들과 팬들을 놀라게 했다.
5월 18일 김은지는 또 한 명의 강자 김지석 9단을 상대할 기회를 얻었다. 무대는 용성전 16강전. 여자들끼리의 무대도 좋지만 기사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자들과의 잦은 만남이 중요한데, 이는 져도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은지가 최근 여자 기사들과의 성적이 좋았던 것도 신진서, 박정환, 문민종 등 톱클래스 기사들과의 대결이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김지석 9단을 만난 김은지는 내심 설레지 않았을까. 사실 김지석 9단과 김은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이다. 2015년 영재발굴단에 출연한 김은지가 자신의 롤 모델을 김지석 9단이라고 밝혔고, 그게 인연이 되어 방송에서 지도대국까지 받았다.
당시 어린 김은지가 수줍은 모습으로 안절부절 바둑돌을 나르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4점 지도기를 마친 김지석 9단은 “나이는 어리지만 유망주답게 부분이 아닌 바둑판 전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틀림없이 좋은 기사로 자라날 것”이라고 했는데 7년 만에 프로가 된 김은지가 호선으로 김 9단과 마주앉은 것이다.
7년 만의 재회였지만 아직은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어린 비둘기가 재를 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국내 최고의 파이터라는 김지석 9단을 상대로 김은지는 초반부터 거칠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었지만, 접근전의 고수는 노련한 반면 운영으로 김은지의 예봉을 가볍게 피해나갔다.
벌써 “최정의 상대는 김은지뿐”라는 말이 기가에 나돌고 있지만 정상권과의 거리는 아직 멀다. 김은지의 현 랭킹은 5월 현재 104위다. 4월에 205점을 올려 51계단 뛰어올랐다. 여자랭킹은 최정 9단, 오유진 9단, 김채영 7단에 이은 네 번째. 최정과는 427점, 오유진과는 80점 차이가 난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줄여나갈 수 있을지 기대된다.
김은지의 소속 팀 섬섬여수 이현욱 감독은 “신예들은 수많은 실전경험과 강자들과의 대국을 통해 성장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김은지 3단이 신진서, 박정환, 김지석 9단 등과 시합에서 겨뤄본 것은 그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반겼다.
[승부처 돋보기] 실패로 끝난 ‘천재소녀’의 도발
제5기 용성전 본선토너먼트 16강전 흑 김은지 2단 백 김지석 9단 196수끝, 백 불계승
#장면도1(겁 없는 도전)
김지석 9단은 바둑계에서 소문난 싸움꾼이다. 그의 완력은 전성기 이세돌 9단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그런 김지석에 김은지가 먼저 도발을 감행한다. 백1에 흑2의 붙임은 한번 붙어보자는 의도. 인공지능은 A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김은지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장면도2(주체가 안 되는 힘)
백1로 막아 하변 전투는 일단락. 인공지능은 정확히 50 대 50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곧장 흑2로 붙인 후 4로 끊은 것이 김은지의 두 번째 도발. 힘이 넘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이랄까. A로 걸쳐 놓고 상대의 동태를 살피면서 백△에 대한 공격을 노리는 게 좋았다.
#장면도3(태극권 고수처럼)
백1이 침착. 흑은 2·4로 여전히 강경일변도지만 백3 이하 11까지 물 흐르듯 흑의 포위망을 벗어난다. 마치 유연한 태극권 고수의 풍모를 보는 듯하다.
#장면도4(숨어있던 수단)
흑의 도발은 흑▲ 두 점이 백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변엔 실전에 나오지 않은 수단이 존재하는데 백1의 붙임이었으면 흑이 곤란했다. 흑2면 백3이 통렬. 백9까지 패가 예상되는데 11 등이 유력한 팻감이라 흑이 버티기 어려웠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