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연 시인 “테러범 골절 사연은 노코멘트”…당시 사건 현장인 세종홀은 코시국 이후 휴업중
지난 5월 20일 삼성 반도체 평택캠퍼스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방한 일정 테이프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끊었다. 이 일정을 밀착 수행한 인물은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였다. 그는 현재 삼성전자 북미법인 부사장으로 한·미 반도체 협력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리퍼트 전 대사는 미국 민주당 진영에서 손꼽히는 지한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심복이기도 했다. 리퍼트 전 대사는 미 해군 정보장교 출신으로 오바마 전 대통령이 상원의원으로 재임 중인 시절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로는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서실장,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미국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 등 요직을 거쳐 2014년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주한 미국대사 재임 중 리퍼트 전 대사는 다양한 방면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쌓아올렸다. 리퍼트 전 대사는 스케줄이 없는 날엔 프로야구단 두산 베어스 경기를 수시로 관람한 한국 야구팬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원정출산’을 한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출생한 자녀 두 명에게 세준과 세희라는 한국식 미들네임(Middle Name·가운데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리퍼트 전 대사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2015년 3월 5일 벌어진 피습사건이었다. 외교가에선 ‘대형 사고’라는 평가를 받은 일대 사건이었다. 사건 무대는 주한 미국대사관 건너편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이었다. 당시 리퍼트 전 대사는 이곳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조찬포럼에서 발언 중 포럼 참석자가 휘두른 흉기에 피습 당했다.
한 외교가 관계자는 “당시 상황은 정말 외교적으로 볼 때 아찔했던 순간”이라면서 “미국 대통령 대리인 격으로 한국에 파견된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을 당해 피를 철철 흘리며 밖으로 피신했는데, 정말이지 외교적 대형사고였다”고 돌아봤다.
피습은 경찰 및 경호인력이 손쓸 틈도 없이 찰나의 순간에 이뤄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취재에 따르면 조찬포럼 중 벌떡 일어선 참석자 김기종 씨가 흉기를 들고 리퍼트 전 대사에게 뚜벅뚜벅 걸어갔고, 인사를 하려는 줄 알고 엉거주춤 일어섰던 리퍼트 전 대사는 김 씨가 휘두른 흉기에 얼굴 쪽을 공격당했다.
개량한복에 빵모자를 쓰고 있던 김 씨는 다양한 사건·사고 중심에 연루된 전력이 있는 인사였다. 그는 2010년 주한 일본대사 습격사건, 2014년 박원순 시장 강연회 시민 폭행사건, 2015년 1월 EXO 공연 행사 공무원 폭행사건에서 묻지마 폭력행위를 저지른 바 있었다. 그런 김 씨가 2015년 3월 5일 오전 주한미국대사 참석 조찬포럼에선 흉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조찬포럼 당시 김 씨가 앉은 자리는 리퍼트 전 대사가 앉은 자리와 불과 5m 거리일 정도로 가까웠다. 돌발 상황이 일어난다면, 현장 인력의 발빠른 대응이 어려운 구조였다. 그러나 김 씨의 피습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시인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ROTC통일정신문화원 정책실장 신분으로 참여한 이시연 씨였다.
2010년 개봉한 영화 레드(RED)는 은퇴한 전직 첩보원의 모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제목 레드는 ‘Retired Extremely Dangerous(극히 위험한 은퇴자)’의 약자다. 이 씨 역시 극히 위험한 은퇴자라 불릴 만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업계에서는 ‘전설의 강철부대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 씨는 육군첩보부대 HID 팀장으로 재직했던 예비역 정보 장교였다. 최근 채널A 예능프로그램 강철부대를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바로 그 HID다. HID 요원은 영화 ‘아저씨’에서 배우 원빈이 연기했던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직무다.
이 씨는 현역 시절 아웅산 테러 보복 작전, DMZ XX XX 작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주 소말리아 북한 대사관 수색 작전 등에 투입됐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현지서 CIA 첩보 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다. 정보사 내부에선 오랜 기간 에이스 요원으로 불렸다는 후문이다.
2009년 예편한 이 씨는 은퇴 이후 ‘달을 쏜 저격수’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각종 작전에 투입되면서 느꼈던 감정을 글로 풀어낸 시집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각종 시민 안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대한민국ROTC통일정신문화원 정책실장으로 세종홀 민화협 조찬포럼에 참석했다.
5월 23일 이 씨는 일요신문과 만나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 씨는 “불과 5m 남짓한 거리를 김기종이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사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고 했다. 이 씨는 “정규전을 한 군인 출신과 정보전을 한 특수요원 출신의 특성은 다르다”면서 “우리 같은 경우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즉시 몸이 움직이게끔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김기종이 일어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갔다. 그가 칼을 휘두른 뒤 칼이 한번 더 위쪽으로 향했다. 틈이 보여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허리가 완전히 감싸쥐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 이거 큰일났다’ 싶었다. 저 칼을 내가 맞으면 죽겠다 싶었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속칭 ‘아스바리’라는 기술을 썼다. 안다리를 걸면서 상대방을 밀어 넘어뜨리는 기술이다. 김기종을 넘어뜨린 뒤 양팔을 잡아달라고 소리쳤다.”
이 씨 증언에 따르면 그가 양팔을 잡아달라고 소리친 뒤 함께 몸싸움을 벌이던 장윤석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김 씨 등에 올라타 그를 제압했다. 이 씨는 “당시엔 매스컴에 잡히는 게 부담스러워 김 씨의 팔과 다리를 제압한 인력이 투입된 뒤 나는 뒤로 빠졌다”면서 “그런데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당시 상황 관련 인터뷰를 요청해 결국 매스컴을 타게 됐다”고 했다. 이 씨는 “직접 흉기를 회수해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면서 “아무도 그 칼을 건들지 않더라. 25cm 정도 되는 과도였다”고 덧붙였다.
사건은 종결됐다. 리퍼트 전 대사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김기종 씨는 발목이 골절된 상태로 경찰에 체포됐다. 검거와 수사 과정에서 김 씨는 발목 골절로 인한 통증을 호소했고 발목을 수술했다. 김 씨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목 골절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이 씨는 “신발도 벗겨지지 않고 발을 가만히 두면 도망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서 “그 이후 그의 발목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만, 비공개로 해둬야 한다”면서 묘한 웃음을 보였다.
이후 리퍼트 전 대사는 이 씨 등 사건 당시 김 씨 진압에 도움이 됐던 이들을 초청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리퍼트 전 대사가 직접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미국 정부 측의 감사 표시는 계속됐다”고 이 씨는 말했다. 이 씨는 “당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방한해 사건 진압에 공을 세워 고맙다고 편지와 감사패를 줬다”면서 “이게 존 케리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과 감사패”라고 보여줬다.
이 씨를 잘 아는 안보단체 관계자는 “그건 당시 김기종 씨가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 거다”라면서 “전설의 강철부대장이 옆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라곤 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씨는 “그때 이후로는 강원도 산골에 머무르며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그날 김기종을 제압한 것이 내 특수 활동 은퇴전이나 다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론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도 내가 직접 나설 것 같진 않다”면서 웃었다.
피습 사건 이후 리퍼트 전 미국대사는 한국과 더욱 깊은 유대감을 과시했다. 지금도 리퍼트 전 대사와 한국의 인연은 현재 진행형이다.
피습사건이 일어났던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은 현재 굳게 잠겨 있다. 광화문 광장 공사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종문화회관 인근 유동인구가 급감하면서 세종홀을 위탁운영할 민간사업자 수요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홀은 피습사건 이후인 2017년 세종홀 컨벤션으로 새단장했으나 코로나19 등 외부 환경이 맞물리면서 최근엔 운영을 하고 있지 않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에 따르면 세종홀은 현재 운영을 하고 있지 않으며 리모델링이 계획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리모델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세종홀은 예정된 계획에 따라 휴업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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