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다피 생전 모습. |
“슬프고 분노에 찬 나날들이었다.”
100여 대의 호위 차량과 함께 탈출하던 중 카다피와 함께 체포됐던 친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는 카다피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0년부터 카다피를 위해 일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다피의 곁을 지켰던 최측근으로, 탈출 당시 카다피와 함께 도요타 랜드크루저에 탑승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현재 미스라타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는 카다피가 리비아를 탈출하지 않고 고향인 시르테에 숨어 지냈던 이유에 대해 “넷째 아들 무아타심이 내린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카다피의 고향이기 때문에 의심을 살 확률이 낮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측근들의 생각은 달랐다. 카다피의 보좌관들은 서둘러 후퇴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거듭 리비아를 떠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결국 아들의 결정을 따랐으며, 죽어도 조상들의 땅에서 죽겠다며 배짱을 부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다오는 “카다피가 상황을 과소평가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리비아에서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8월 19일 트리폴리가 시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도주했던 카다피는 그 길로 즉시 시르테로 향했다. 아들 무아타심과 24명의 측근들, 그리고 35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시르테에 몸을 숨겼던 카다피의 비참한 날들은 그렇게 시작됐다.
매일 밤 버려진 폐가를 찾아 숨어 지냈던 카다피 일행은 절대로 같은 집에서 나흘 이상은 머물지 않았다. 폐가는 TV는커녕 전화기도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과 격리된 카다피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거나 메모를 하거나, 혹은 석탄 난로에 차를 끓여 마시면서 보냈다.
다오는 “그는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분노했으며 때때로 미쳐 날뛰기도 했다”라며 “하지만 어떤 때는 그저 슬픔에 싸인 채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카다피는 리비아 국민들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가 트리폴리가 시민군에 의해 함락된 사실을 상기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늘 그렇게 믿었다”며 “카다피가 도피 생활 내내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먹을 것 역시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데일리텔래그래프>에 따르면 카다피 일행은 영양 상태가 형편없었으며, 늘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먹는 것이라곤 터키군이 버리고 간 군용 식량과 스파게티 소스로 사용하는 으깬 토마토 깡통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호화로운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던 카다피는 도피 중에도 늘 전속 요리사를 대동하고 다녔다.
이와 관련, 카다피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것으로 알려진 시르테 북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2층 주택의 인근에 살고 있는 한 남성이 <신화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목격담을 털어 놓았다. 그는 “카다피는 뒷마당에 임시 부엌을 설치해 놓았다. 전속 요리사가 이곳에서 식사를 만들어서 카다피가 숨어 있는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곤 했다”고 말했다. 간이 부엌에는 혹시 발생할지 모를 폭격에 대비해서 강철 지붕을 설치했으며, 건물 창문에는 염탐꾼과 총알을 피하기 위해서 모두 강철판을 덧대 놓았다.
한때 600만 명을 통치하면서 호령했던 카다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용한 모습이었다. 다오는 “그는 전쟁을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며 “그를 대신해서 작전을 세우고 친위대를 이끌었던 인물은 아들 무아타심이었다”고 전했다.
이런 까닭인지 친위대들 역시 도피 생활이 길어지자 점차 와해되기 시작했다. 처음 350명이었던 친위대는 도망을 가거나 총격전으로 사망하면서 그 수가 점차 줄었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고작 150명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며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독재자의 최후는 앞서 간 다른 독재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프리카에 불고 있는 민주화 물결이 카다피의 몰락을 계기로 과연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