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이 스위스에 와서 개인 주택을 빌려 묵었어요. 그런데 주인 허락도 없이 창문을 모두 방탄유리로 바꾸고 집 주위에는 탱크를 배치했어요. 그리고 레만 호수에는 함정을 띄우고요. 당신네 나라는 참 이상해요. 우리 스위스는 대통령이 퇴근하다가 시민과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대통령 부인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도 해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다음 번에 온 한국 대통령은 유서 깊은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그 호텔 로비에서 경호원을 만나 얘기를 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경호는 경호가 아니라 의전이에요. 대통령 차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경호원이 서 있는 게 보여야 대통령이 기분이 좋은가 봐요. 이 추운 겨울 대통령이 골프를 치면 우리들은 반 죽습니다. 경호원들이 눈에 안 띄게 골프장 눈 덮인 나무 아래 숨어서 몇 시간을 서 있어야 해요. 한 자리에서 몇 시간 서면 완전히 고드름이 되죠. 대통령이 홀을 옮길 때면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에 손잡고 띠를 이루면서 뒤따라갑니다.”
겉으로는 보통 사람이라고 하지만 대통령은 왕 같은 존재였다. 골프공을 주워주는 청와대 직원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법정에 선 소설가 김홍신의 변호를 했었다. 그는 대통령의 위선과 거짓에 대해 독한 말을 퍼붓고 기소 당했다. 그는 법정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대통령이 퇴근길에 지하철에 올라 옆 좌석 시민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한 겁니다. 미움이나 적대감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원래는 친했어요.”
나는 소설가의 그 생각에 공감했다. 겉으로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면서 속은 왕을 모시는 나라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도 지도자를 ‘시민의 일인자’라고 했다. 그래서 왕관이 아니라 월계수로 만든 소박한 관을 지도자의 머리에 쓰게 했다.
몇 년 전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원장들이 뇌물죄로 기소됐다. 나는 뇌물을 제공했다고 기소된 국정원장의 변호인으로 그 재판에 참여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그걸 받았는지 물어봐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는 법정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보통사람이면 강제구인이라도 해서 물었다. 그러나 재판장은 전직 대통령의 거부에 꼼짝 못했다. 대통령은 법정에서도 신분이 다른 것 같았다. 국회 청문회를 보면 총리나 장관들이 의원들의 험한 입에서 나오는 불세례를 받기도 한다. 제도적인 면으로 보면 법정에서 변호사도 신문권이 있다.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았다.
나는 서면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세세하게 따졌다. 얼마 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분이 나에게 “어떻게 지존에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지존이란 임금이란 말이었다. 그는 대통령은 임금이라는 의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다. 방청석에 나온 ‘박사모’라는 사람들도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가치보다 위인 것 같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는 왕궁인 청와대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집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산뜻한 뉴스를 하나 더 봤다. 대통령이 점심시간 용산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허름한 국숫집에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 시간 국숫집에는 직장인들이 들어차 있었다.
대통령은 옆자리에 있는 직장인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식사 후에는 바로 옆에 있는 ‘소보로 빵집’에 들렸다. 작은 행동이지만 큰 의미였다. 철학자 헤겔이 말했듯이 세계역사의 흐름은 왕이 보통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대통령은 양떼를 이끄는 목자여서도 안 된다. 그냥 양떼의 모범이면 된다.
새로운 시대의 이상은 무엇이어야 할까. 모든 사람이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이 그런 시대적 이상의 아이콘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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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