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농협노조가 지난 4월 19일 농협중앙회 중앙본부 앞에서 농협 전산망 마비 사태와 관련해 최원병 회장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지난 4월 금융업계에 두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현대캐피탈의 고객정보 유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농협의 전산 장애 사고다. 농협 전산 장애는 사고 후 복구가 지연되면서 이용자들은 며칠 동안 금융거래에 애를 먹어야 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최원병 회장의 사고 후 태도였다. 최 회장은 사고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명색이 수장이라는 사람이 “비상근이라 책임질 것이 없다”며 부하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가 하면, 기자회견장에서 부하직원에게 큰소리를 내기도 했다. ‘양치기 농협’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복구 시기에 대한 말이 자꾸 바뀌는 것을 비난하자 “기자들이 당한 것과 (나도) 똑같다”고 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검찰 수사 결과 농협의 보안 관리·감독이 매우 허술하고 최 회장이 해명한 것과 판이하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 회장은 기자회견을 하다 말고 전국조합장모임 참석을 이유로 자리를 뜨려 하기도 했다. 사죄하러 나온 자리가 맞는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들이었다.
지난 9월 22일 금융감독원은 농협 전산 사고의 책임을 물어 농협에 ‘기관경고’를 결정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법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계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이 ‘문책경고’를 받은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농협 측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첨단보안설비 및 전산장비를 갖춘 새로운 전산센터를 신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지난 6월 ‘NH통합IT센터 설계·시공’을 위한 입찰 안내서 작성 용역공고를 냈다. 그러나 비용 중 상당 부분을 보안 강화보다 건물 신축에 들인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NH통합IT센터 신축과 관련해 좋지 않은 소문도 들린다. 내부적으로 이미 경기 안성에 있는 농협 제2전산센터를 지은 건설사로 시공사를 선정해놓은 상태라는 것. 이에 그치지 않고 농협 실무자들이 해당 건설사에 거액의 리베이트를 요구했다는 설도 퍼졌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부인했다.
이후에도 최 회장의 부적절한 행동과 발언은 계속됐다.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은 농협중앙회의 부실채권 규모와 비율이 높아진 것을 지적했다. 최 회장은 “제가 2008년도 와서 그 부분이 부실됐는지 저 오기 전에 대출한 부분이 부실됐는지…”라며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최원병 회장의 연봉이 12억 6000만 원에 이른다는 강봉균 민주당 의원의 문제제기도 눈길을 끌었다. ‘비상근’ 회장의 연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농협의 최대 현안인 신경분리(은행·보험 등 금융을 담당하는 신용사업 부문과 유통·판매를 담당하는 경제사업 부문 분리)와 관련해서도 최 회장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당초 농협의 사업구조 개편을 위해 정부에 6조 원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정부가 난색을 표하며 4조 원만 지원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출연이나 출자가 아닌 차입 방식이다. 최 회장이 공약했던 ‘정부 출연 6조 원’이 물 건너가기 일보직전인 셈이다. 이를 두고 농협 내부에서는 ‘최 회장에게 속았다’는 분위기까지 감지되고 있다.
국정감사에서는 지난 9월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한 농협중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전국 농업인 한마음 전진대회’에 33억 원을 쓴 것도 질타를 받았다. 경제가 어렵고 농협이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터에 큰돈을 들여 행사를 개최한 것이 부적절했다는 지적이었다. 이 자리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최 회장은 이날 농협사업구조개편의 공로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금탑산업훈장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수훈 명단에서 빠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날 행사에선 빠졌지만 사실 따로 받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구조개편 문제가 농협 내부에서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데다 불미스러운 일이 겹친 시기에 대놓고 훈장을 받기가 부담돼 명단에서 일부러 뺐다는 것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수훈이 확정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수훈 방식과 절차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묘한 답변을 했다.
최 회장의 일련의 행보는 다가오는 선거와 연결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산 사고에 대해 사죄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조합장 모임에 가야겠다”며 자리를 뜨려 한 것, 농협중앙회 자회사 임원들의 해외연수 경비를 부담한 것은 물론 명품 핸드백을 선물했다는 의혹, 인사와 지원금 규모를 대의원들에게 유리하게 했다는 의혹 등도 이에 해당한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김우남 민주당 의원은 “선거를 의식한 선심성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농협중앙회장 선거에는 전남 나주·남평농협 김병원 조합장, 경남 합천·가야농협 최덕규 조합장, 최 회장 등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2007년 선거와 같은 경쟁구도다. 2007년 선거에서 최 회장은 1차 투표에서 김 조합장에 밀려 2위를 차지했으나 결선투표에서 김 조합장을 물리치고 회장에 당선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지 8일 후의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포항 동지상고(현 동지고) 4년 후배인 최 회장은 이 대통령과 캐릭터도 비슷해 ‘왕의 남자’로 불린다. 이상득 의원과도 친분이 있는 대표적인 ‘MB맨’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농협 안팎에선 최 회장이 다음 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아무리 규정상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재직 당시 회장 선거제도와 방식이 변경된 마당에 다음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이 과연 도의적으로 합당한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농협중앙회가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최근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린 데다 사업구조개편 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정권 말기에 대표적인 ‘MB맨’인 최 회장이 많은 비판을 무릅쓰고 과연 재출마를 강행할지 주목된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최 회장) 출마와 관련해 결정된 것은 없다”며 “우리로서도 후보등록 기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