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장 모슬포항부터 이병헌·신민아 데이트 금능·협재까지…차귀도·수월봉 배경 인생샷은 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시장이다. 제주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대정읍의 조그만 재래시장인 모슬포 중앙시장. 바다와 시장을 무대로 삶을 펼치는 ‘우리들의 블루스’ 주인공들은 대개 시장에 기대어 삶을 이어간다. 드라마의 시장 장면은 모슬포 중앙시장 외에도 끝자리가 4, 9일에 열리는 성산읍 고성 오일장과 서귀포매일올레시장 등 제주 전역의 여러 시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굳이 모슬포 중앙시장에 가보고 싶었던 건 작은 규모와 관광객이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모슬포 중앙시장은 겨우 50여 개의 점포를 아담하게 품고 있다. 시장에선 생선도 팔고, 과일과 야채도 팔고, 순댓국도 판다. 생닭도 팔고, 고기도 팔고, 떡도 팔고, 꽈배기도 팔고, 옷도 팔고, 반찬도 판다. 규모는 작아도 화개장터처럼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는 건 없는 재래시장이다.
시장 양쪽에 줄지은 점포 사이로 난 길의 폭은 1m 정도밖에 안 된다. 양쪽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참 가까이도 맞대고 있다. 그러니 이 시장에선 더 이상 물건을 파는 일에 경쟁이 생기지 못할 것 같다. 하루 중 손님이 오는 시간은 잠깐이고 어쨌든 상인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눠야 할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모슬포 중앙시장에서 제주 전통 간식인 오메기떡과 쑥빵을 3000원어치 샀다. 이젠 섬의 귀퉁이 이렇게 작은 재래시장에서도 현금이 없어도 괜찮다. ‘파파 할머니’들도 계좌번호가 쓰인 종이를 내미는 시대이니 빈손이라도 어디서건 못 살 게 없다. 주전부리를 사고 계좌이체를 하니 할머니 주머니 휴대폰에서 ‘띠링띠링’ 입금을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리를 확인한 서로가 한번씩 웃으면 거래는 끝난다. 거래는 신식이어도 여전히 많이 사면 덤도 있고 에누리도 있는 시장이다.
초여름 푸르게 익은 아기 주먹만 한 청귤이 눈에 밟혀 이것도 5000원어치 산다. 1kg에 5000원인 청귤은 작아도 스무 개가 넘는다. 모슬포 청과 아주머니는 “여기가 드라마에도 나왔어. ‘우리들의 블루스’ 거기서는 햇빛청과로 나왔지. 저 건너 집도 나왔고, 여기서 차승원이 몸에 띠 두르고 돌아다니는 거 찍었어”라며 드라마 장면을 알려준다. 아주머니는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탤런트들이 여름 장면 찍느라고 반팔 옷 입고 벌벌 떨면서도 더운 척하며 찍더라고. 그게 얼마나 재밌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던지…”라며 회상한다.
시장에서 나와 이제 모슬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거기엔 포구가 있고 신협이 있고 위판장이 있다. 드라마 초반부 생선 경매 장면 등을 이곳에서 찍었다. 경매도 다 끝나고 배들도 쉬는 한산한 한낮의 포구에는 할머니 두 분만이 소금에 절인 갈치와 자리를 팔고 계셨다. 김혜자와 고두심 커플을 생각나게 하는 할머니들은 외지인에게 대뜸 “갈치는 구워먹거나 조림해 먹고 자리는 젓갈 해먹어. 갈치 2만 원어치만 사. 나도 인제 들어가게. 자리는 거저 줄 테니” 한다. 여행객이 섣불리 갈치를 살 리 만무하지만 할머니의 눈빛은 진지하다. 그 진지함 때문인지 이내 갈치를 사려는 손님도 나타났다.
조금 더 길을 달려 금능항으로 간다. 지금은 자취도 없지만 금능항은 한지민의 포장마차 ‘푸릉’이 있던 곳이다. 선장 김우빈이 해녀 한지민과 고두심을 바다까지 배로 실어 나르던 항구이기도 하다. 금능항 역시 제주의 뭇 항구들이 그러하듯 아담하고 고요하다. 아침이라면 모를까 한낮의 포구는 쉬는 시간이다.
포구엔 어디라도 어김없이 등대가 있고 방파제가 있고 고깃배가 있다. 주렁주렁 조명이 달린 오징어배들이 한가로이 정박해 있다. 그렇더라도 길가에 펼쳐진 그물망이나 한편에 걸린 작업복들이 포구의 치열한 시간을 조용히 드러낸다. 포구에는 현실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맑은 날도 안개가 끼는 날도 밝은 날도 어두운 날도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관심을 갖거나 말거나.
금능항은 이미 도민에게나 관광객에게나 ‘핫플’이 된 금능해변에 바로 붙어 있어선지 항 인근으로 세련된 다국적 퓨전 식당도 꽤 보이고 해산물을 주로 파는 전통적 해변 식당들도 있다. 그중 겉으로 딱 보기에도 맛집 포스가 풍기는 곳으로 들어가니 이병헌 사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2021년 11월 18일에 방문한 흔적이다. 겨울에 여름 신을 찍었다는 모슬포 청과 주인의 말처럼 이병헌도 초겨울에 반팔을 입고 만물상 트럭을 몰고 다니는 장면을 찍었을 테다. 식당 주인은 자랑스레 이병헌이 맛있다고 한 오징어볶음을 먹어보라 권한다.
금능항 바로 옆으로는 신민아와 이병헌이 비양도를 끼고 데이트를 했던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이 있다. 금능해수욕장은 아이들이 놀기 좋을 만큼 얕은 해변이지만 그 물빛만큼은 한길 사람이 알 수 없을 만큼 천길보다 깊고 오묘하다. 햇살 비추는 맑은 물빛을 바라보고 있자면 한껏 마셔버리고도 싶고 풍덩 빠져서 아예 헤어 나오고 싶지 않기도 하다.
금능해변에서 헤엄치면 수영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이 가까운 비양도는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더 가까이 있다. 1km나 먼 바다로 나가도 겨우 허리밖에 올라오지 않는 해변의 깊이 때문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비양도는 이병헌이 만물상 트럭에 물건을 가득 싣고 팔러 갔다가 이미 다른 트럭에게 물건을 산 할매들에게 징징대고 화내다가 돌아온 곳이다.
금능해변에서 10분 더 해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수리방파제와 대수포구가 나온다. 신민아가 바다에 힘없이 자신을 내던지며 자신의 생을 마감하했던 곳이다. 해녀들에 의해 바다에서 건저 올려진 신민아는 오히려 덤덤한 모습이었다.
포구는 어쩌면 곳곳에서 누군가에게는 그 땅의, 그 삶의 끄트머리일지도 모른다. 육지가 끝나고 바다로 이어지는 포구의 지형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다름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신민아처럼 밀려나듯 끌려가듯 삶의 바다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고두심‧한지민 해녀들처럼 빈 몸으로 망태기 하나 들고 용감하게 뛰어드느냐의 차이다. 어차피 바다에서 건질 것은 전복과 소라뿐이고 삶에서 건질 것은 용기와 사랑뿐이지 않던가.
어느새 일몰이 가까워온다.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마지막 여정으로 신창풍차해안도로를 택했다. 제주 서쪽의 일몰명소인 이곳은 제주에서도 바람이 가장 모질게 부는 곳으로 바다 위에 건설된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풍경을 압도하는 곳이다. 해안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할 수도 있지만 차는 잠시 세워두고 싱계물공원부터 등대까지 바다로 난 인공 다리를 따라 산책해 보자. 싱계물은 제주 사투리로 ‘새로 발견한 갯물’이라는 뜻으로 갯물은 용천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방으로 돌담을 둘러친 바다 목욕탕도 보존되어 있다.
만조 때면 다리가 물에 잠겨 걸을 수 없으니 간조 때 도착했다면 고민 말고 걸어둘 일이다. 걷다보면 ‘우리들의 블루스’를 촬영했던 작은 돌담 건물에서 인생샷도 찍을 수 있다. 멀리 보이는 차귀도와 수월봉도 풍경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제주=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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