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앞에 들어선 ‘반월가 시위대’ 텐트촌. 이승환 통신원 |
경찰 10여 명이 시위대 주변을 순찰했고, 관광객들이 카메라로 시위대를 찍었다. 인근 금융가에서 일을 하는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맞아 세인트폴 성당 건너편에 즐비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2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샌드위치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텐트 문을 열었다.
#11일째 이어오는 텐트 시위
“텐트 안에서 먹고 자며 시위한다. 비가 내리는 등 환경적 열악함만 없으면 딱히 불편한 점이 없다.” 영국 남성 잭(가명·21)의 말이다. 잭은 세인트폴 성당 앞에서 ‘텐트 시위’를 한 지 11일이 되었다. 11일 전 유럽연합(EU)의 수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의 긴축 정책과 금융자본주의에 분노한 수천 명의 유럽 젊은이들이 몰렸고, 같은 날 런던 등 인근 유럽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인 카이(21)는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했다. 월가 점령 시위 또한 금융자본의 권력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10월 말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카이는 열흘 전쯤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왔다. “청년 실업과 양극화는 미국을 비롯, 유럽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시위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런던으로 오게 됐다.”
중산층도 시위에 참여했다. 제시카(가명·여·40)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한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날 오전 런던에 도착했다. 10세 이하의 아들 두 명이 시위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텐트 주변을 돌아다녔다. 제시카는 전업 주부이고 남편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돈벌이는 없지만, 넉넉한 형편의 부모님에게 지원을 받아 생활이 어렵지 않다. “(이 정부는) 성장만 우선시하고 분배를 완전 무시하고 있어요. 이렇게 복지 혜택이 줄어들면 서민층은 물론 저 같은 중산층도 위기에 몰릴 거예요. 결국 이 정부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재벌밖에 없을 겁니다.” 제시카가 걱정하는 건 ‘미래’였다. 제시카는 영국 정부가 민영화를 확대 추진하고 대학 수업료를 대폭 인상하는 등 지나치게 친시장주의 노선을 하는 것이 불안하다고 말했다.
▲ 10월 31일 세인트폴 성당 근처에서 해골 마스크를 쓴 시위자가 다가오자 한 여성이 깜짝 놀라고 있다. AP/연합뉴스 |
60대의 스튜어트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일까’라는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었다. 환경운동가인 스튜어트는 미국 등 강대국이 자원에 눈이 멀어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2000년대 초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을 떠올려봐라. 자유를 수호한다느니 얘기하지만 사실 석유 때문에 벌인 전쟁 아닌가.” 문제는 전쟁 때문에 생활의 터전인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라고 스튜어트는 생각했다.
호주인 키아론(51)은 ‘줄리언 어산지에게 자유를’이라고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었다. 줄리언 어산지는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의 대표로 스웨덴에서 여성 두 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영국에서 체포됐다가 지난해 12월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주한미군과 관련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밀월 관계를 폭로하기도 한 위키리크스는 최근 금융업체들이 후원금을 끊은 뒤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키아론은 후원금 중단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했다. “지금 미국은 황제처럼 행동하고 있다. 모두가 미국 눈치를 보고 있다.”
사회주의 활동가 샘(24)은 11월 초에 있을 영국 공무원 파업에 대한 지지 서명을 받고 있었다. 샘은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다만 영국 정부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미국식’이 마뜩치 않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경쟁을 부추기긴 하지만, 사회구성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등 필요한 부분도 있다. 문제는 사람을 기계처럼 일하게 만드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인권에 어긋날 뿐 아니라 지도층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런던 윔블던에 사는 16세의 콜(가명)은 아침마다 시위대가 있는 세인트폴 성당으로 온다. 콜은 모두 공정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최근 들어) 대학 등록금이 올라 대학 입학을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런 걸 보고 참을 순 없잖아요. 부모님들께서 걱정은 하지만 시위를 하는 저의 선택을 존중해요.”
영국 명문대인 런던대학교(UCL)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에이미(20)는 생각이 달랐다. 런던시청에서 부업을 하는 그는 런던에 대한 홍보 내용이 적힌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시위대에 불만을 터트렸다. “시위대 때문에 관광객이 줄어들고 공권력이 투입되는 등 국가적 손실을 겪고 있어요. 돈으로 치면 하루 3만 파운드(약 5360만 원) 정도를 버리고 있습니다.”
늦은 오후 무렵, 바람이 거세지자 시위대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대가 모인 텐트에서 약 1분을 걷자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경계선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경계선 너머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여기는 (성당 앞과 달리) 사기업이 운영하는 사적 공간입니다. 기업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습니다.” 경찰들은 시위에 대해 답변을 꺼려했지만 심정적으로 시위를 지지하는 듯했다. 한 경찰은 “오죽 사는 게 힘들면 저러겠나. 나는 저들을 지켜야 할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하늘이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성당 주변 회사의 직장인들이 대거 퇴근길에 올랐다. 시위 참가자 몇몇은 직장인들을 향해 “우우”하는 야유를 쏟아냈다. 그날 밤 인근 술집에는 정장 차림의 남성과 여성들이 가득 찼고, 시위대 중 10여 명은 짐을 챙겨 인근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시위가 지속되면서 시위 참가자들이 텐트만 그대로 남겨둔 채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시위하러 오는 현상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변호사 케빈(53)은 텐트를 발로 걷어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들은 텐트에서 기거하며 시위를 할 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않다. 시위대의 존재가 거슬리는 데다 정신 사나워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근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모두 시위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퇴근하던 한 금융업체 소속의 30대 남성은 “내가 직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당연히 시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시위 외에는 방법이 없다
로빈(가명·19)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11일 동안 텐트 안에서 먹고 자며 시위를 이어왔지만 “시위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로빈은 현재 직장이 없고 가정 형편도 어렵다. 부모가 모두 비정규직인 로빈은 집에서도 자주 굶는다고 말했다. 로빈은 “당신도 내 처지가 되어보라”며 “지금 상황이 시위를 하도록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운동가, 사회주의 활동가, 복지운동가 등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구호를 외쳤지만, 이들은 하나 같이 희망을 바라고 있었다. 자정 무렵 세인트폴 성당 앞 텐트 주변은 잠이 든 듯 조용했다. 다시 아침이 되면 시위대가 텐트 주변에 몰릴 것이었다.
이승환 영국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