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올브라이트 미국 전 국무부 장관. |
‘권력은 남성적’이란 말도 이제 옛말이 된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우먼파워가 거세지면서 ‘부드러운 권력’이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주목받는 여성 권력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등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 ‘파워 우먼’ 대열에 합류한 여성으로는 지난 6월 세계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 선출된 크리스틴 라가르드(55)가 있다. 그녀의 등장은 정재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IMF 64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재인 동시에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금융업계에서 여성이 수장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법조계, 정치계를 비롯해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세계 금융업계에도 마침내 여풍이 불기 시작했다. ‘양복의 물결’ 속에서 앞으로 그녀가 과연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가 큰 관심거리인 가운데, 한편에서는 그녀의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 속에 그 해답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남성스런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고 우아한 여성스런 스타일이 오히려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최신호에서 ‘이제 권력이 여성스러워졌다’고 말하면서 라가르드를 비롯해 많은 여성 권력자들이 과거와 달리 여성스러움을 한층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최초이자 세계 세 번째 여성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강인한 이미지와 중성적인 외모로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그녀는 60년대 총리직에 있는 동안 이런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견고히 했으며, 일부러 더 남성답게 행동하곤 했다. 가령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고, 심지어 회의를 하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곧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독일의 메르켈 총리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처음 총리직에 올랐을 당시 외모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빗지 않은 듯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바지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일 정도였다. 이것은 자신은 오로지 정치에만 열중할 뿐 멋을 부리는 등 쓸데없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바람과 달리 독일 국민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은 외모에도 신경을 써야 좋은 이미지를 풍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40여 년 전 메이어의 투박하고 촌스런 스타일이 아무런 흉이 되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결국 메르켈은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밝고 화사한 색상의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세련된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등 눈에 띄는 스타일로 변신을 꾀했다. 말하자면 중성적이었던 그녀가 한층 여성스럽게 변신한 것이다.
메르켈의 경우처럼 이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그리고 권력을 거머쥔 여성일수록 어두운 색상의 바지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더 나은 남자’ 흉내를 냈던 여성들이 이제는 오히려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면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라가르드 총재, 라시다 다티 프랑스 법무부 장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슈테른>은 “이제는 권력이 여성스러워졌다. 패션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하면서 가장 선구자격인 인물들로 콘돌리자 라이스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꼽았다. 둘의 공통점은 국무장관 시절 전통적인 스타일 대신 톡톡 튀는 색다른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데 있었다.
▲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전 국무부장관(왼쪽)과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 |
올브라이트의 경우에는 브로치를 애용했다. 딱딱한 정장 차림을 고집하긴 했지만 누구를 만나느냐, 또는 어떤 자리냐에 따라 적절하게 브로치를 바꿔 달아 외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명 ‘브로치 외교’를 선보였다. 가장 화제가 됐던 브로치는 뱀 모양의 브로치였다. 1994년 이라크 신문 <엘이라크>가 그녀를 가리켜 ‘뱀’이라고 부르자 타리크 아시스 이라크 총리 대변인을 뉴욕에서 영접할 때 보란 듯이 뱀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나타났던 것.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미국의 상징인 성조기 브로치를,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 방한했을 때에는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의미로 햇살 문양의 브로치를 착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재 누구보다도 가장 ‘파워 드레싱(자신의 지위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격식적으로 차려 입는 복장)’의 힘을 잘 드러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단연 라가르드 총재를 꼽을 수 있다. 세련된 패션감각과 더불어 180㎝의 훤칠한 키와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가무잡잡한 피부, 은발의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그녀를 스타일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배니티페어>의 베스트 드레서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뛰어난 패션감각을 뽐내고 있는 그녀는 다분히 여성스런 스타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가령 스카프를 즐겨 착용하는 그녀는 어두운 색상의 정장에 자홍색, 비취색, 진홍색 등과 같은 화려한 색이나 굵은 무늬가 들어간 스카프를 매는 식으로 자신을 남성들과 차별화시키는 한편, 자신의 권력을 상대에게 간접적으로 알린다. 즉, 남자들이 넥타이로 자신의 개성이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과 같은 것이다.
이와 관련,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마이클 더글러스가 붉은색 멜빵을 즐겨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바로 이런 점이 라가르드가 권력을 쥐고 있는 다른 대부분의 여성들과 다른 점이라고도 지적했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낸시 펠로시처럼 미국의 파워 우먼들이 헐렁한 정장을 즐겨 입는 것과 달리 라가르드는 프랑스 여성답게 몸에 꽉 맞는 슬림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단지 “나는 패션을 사랑한다. 단 실용적일 때 한해서”라고 스스로 <라트리뷴>에 말한 것처럼 활동하기 편해야 한다는 조건일 경우에 한해서다.
또한 그녀는 비록 남색, 회색, 연갈색, 검정색 등 주로 어두운 색상의 정장을 입긴 하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포인트를 주면서 패션 감각을 뽐내곤 한다. 가령 브뤼셀 회의 때 입은 연갈색 재킷은 옷깃 부분에 가죽이 덧대 있었는가 하면, 프라납 무커지 인도 외교부 장관을 만나는 자리에서 입은 스리피스 정장은 옷깃과 소매 부분에 흰색 포인트가 들어가 있어 마치 80년대 금융업자들이 즐겨 입던 흰색 칼라의 셔츠와 멜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스타일에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외모에 너무 치중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값비싼 옷만 골라 입고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그녀가 과연 공정하게 총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라가르드는 샤넬 꾸뛰르를 즐겨 입거나, 혹은 1000만 원을 호가하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다니는 등 명품을 선호해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프랑스 사회당 소속이자 전 총리였던 로랑 파비우는 “그녀는 지나치게 우아하게 군다”며 비난했는가 하면, 프랑스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우아하고 세련된 양 구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라가르드는 서민층과 분리된 상류층 여성, 그리고 서민들의 복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만 신경 쓰는 여성”이라고 비꼬았다.
사실 공인들은 경기가 어려울 때면 대개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추는 쪽을 택한다. 설령 값비싼 명품 정장을 입었다고 해도 상표가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가르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을 향한 비난을 무시한 채 기존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으며, 여전히 에르메스 백을 들고 샤넬 트위드 정장을 입는다.
이와 관련 <가디언>은 어쩌면 이런 그녀의 고집은 어린 시절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교 시절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국가대표였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어라’는 교훈을 싱크로나이즈드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다. 이 교훈은 훗날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도 늘 그녀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녀는 “정치는 싱크로나이즈드와 마찬가지로 저항과 인내의 스포츠다. 항상 긴장해야 하고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슈테른> 역시 “바지 정장을 멀리한다고 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데 방해가 되는 시절은 갔다”며 “자신감 넘치고 눈에 띄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이 자의식도 강하다”고 말했다.
트렌드 분석가인 엘케 기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가르드와 같은 스타일의 여성들은 능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여성들에게 자동적으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들이 다른 영역에서도 똑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부와 같은 곳에서 말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