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 회장(왼쪽)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가 지난해 7월 10일 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최신원 SKC회장의 장남 성환 씨(30)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
검찰이 서울 서린동 SK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한 것은 지난 8일 오전 6시 30분께.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의 자택을 제외하고 일부 그룹 고위 관계자들의 자택도 함께 압수수색했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등의 비자금 조성, 계열사 자금 횡령 등의 혐의에 따른 것이었다.
SK그룹 측은 전날까지만 해도 최태원 회장이 안토니오 브루파우 니우보 스페인 마드리드 렙솔(Repsol)사 회장과 윤활기유 합작공장을 준공하기로 합의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비롯해 최 회장이 유럽 출장길에서 얻은 성과를 크게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SK 입장에서 검찰의 압수수색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장 부재중이던 이른 아침인 데다 10일로 예정돼 있던 하이닉스 인수 본입찰 시한을 불과 이틀 앞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STX그룹의 포기로 하이닉스 인수 본입찰에는 SK 단독으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검찰이 압수수색을 강행한 것은 그만큼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다수 확보했으며 사건을 더 미루면 안 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검찰 수사의 초점은 최 회장 형제가 비자금을 조성했는지, 또 계열사의 자금을 횡령하고 이 중 일부를 최태원 회장의 선물투자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사용했는지에 맞춰져 있다. 또 최태원 회장 등이 저축은행에서 수천억 원의 대출을 받으면서 개인 자산이 아닌 계열사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했다는 불법성에도 상당한 힘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수사 진행 상황을 보면 최태원 회장은 비리의 중심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하다. 사건의 핵심은 최재원 부회장이다. 실제로 검찰은 최 부회장 혐의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입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8일 새벽 검찰이 서울 서린동 SK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이 과정에서 지난 7월 비자금 조성 혐의가 짙어지면서 최 부회장이 출국금지조치를 받았다. 코스닥 상장업체였던 글로웍스 주가조작 사건과 맞물리면서 투자회사 베넥스인베스트먼트(베넥스)와 이 회사 김준홍 전 대표와 최 부회장의 인연도 밝혀졌다(<일요신문> 989호 최초 보도). 결정적 단초가 된 것은 베넥스 금고에 있던 수백억 원의 수표가 최 부회장의 것으로 드러난 점이다.
SK 계열사들이 베넥스에 2800억 원을 투자했고 이 중 일부가 최태원 회장의 선물투자에 사용됐거나 그 손실 보전금으로 사용됐다는 것이 이번에 제기된 혐의다. 검찰은 또 베넥스에 투자한 SK 관계사 중 일부 회사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인 것으로 보고, 이 회사를 통해 자금세탁이 이뤄졌는지 주목하고 있다.
지난 4월 알려진 최 회장의 5000억 원 선물투자와 이 중 1000억 원대의 손실을 봤다는 소식은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재계 3위 그룹 총수가 무슨 이유로 선물투자에 나섰느냐는 것이다. 선물투자는 ‘도박판’으로 불려 일반인들에게는 위험구역이나 다름없다.
‘주식부호’지만 현금이 별로 없어 그룹 경영권마저 위협받던 최 회장이 현금 확보 수단의 하나로 선물투자를 활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재벌 회장의 선물투자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데 충분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SK그룹 측은 ‘최 회장의 개인자금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국세청 쪽에서도 일단 그렇게 결론 내는 듯했다. 최태원 회장 자신도 불법은 없고 단지 우스운 꼴을 당한 것이 겸연쩍어 손실에 대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내사를 진행해온 검찰은 개인자금일 뿐이라던 최 회장의 선물투자 자금이 실제로는 최 부회장이 마련한 비자금에서 일부 나온 것일 수 있다는 것과 최 회장 형제가 계열사 자산을 담보로 저축은행 등에서 수천억 원대 대출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이것이 결국 그룹 전체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건의 흐름을 바라보는 재계 관계자들은 대체적으로 ‘최태원 회장까지 형사처벌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재원 부회장 선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검찰 주변과 SK그룹 쪽에서도 비슷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재계 3위 그룹 회장과 부회장을 동시에 형사처벌한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SK그룹이 동반성장과 상생협력을 강조하는 최근 정부 기조에 가장 충실한 기업 중 하나라는 점 등이 그 이유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SK가 사회적 기업으로 이름나 있고 최태원 회장 역시 그동안 상생협력에 큰 힘을 기울인 점이 참작되지 않을까”라고 예상했다.
검찰 주변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SK그룹 측도 이를 바라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난해 말 최재원 부회장은 그룹 수석부회장에 오르며 부회장단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에 섰다. 최태원 회장의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는 그룹 지배력을 높이고 신사업 추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형제경영’이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재원 부회장도 최태원 회장에게 계열분리를 위한 지분 요청을 꾸준히 해왔고 최태원 회장은 이를 부정적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최재원 부회장 선에서 마무리된다면 최태원 회장이 최 부회장의 요구를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SK의 전 계열사를 통틀어 지분이 희박한 최재원 부회장이 계열분리를 원했다는 전언이 설득력을 크게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약 최 부회장이 지분을 요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최태원 회장 입장에서는 사촌인 최신원-창원 형제의 계열분리 움직임과 더불어 큰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SK그룹 관계자는 “베넥스와 최태원 회장은 애초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선을 분명히 그었다. 글로웍스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된 베넥스 김준홍 전 대표는 최재원 부회장과의 인연만 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표는 워커힐호텔 비전추진팀장을 거쳐 SK텔레콤 재무팀에서 일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부회장과 김 전 대표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동문이다.
SK 측은 극구 부인하지만 정황상 최태원 회장과 김준홍 전 대표가 전혀 연관이 없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검찰 조사 결과 SK 계열사가 베넥스에 투자한 자금 중 일부가 김 전 대표의 차명를 통해 김원홍 씨에게 간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SK해운 고문 출신인 김 씨는 최 회장의 선물투자를 맡았던 ‘역술인’으로 알려졌으며 ‘최 회장이 주변의 권유로 선물투자를 시작했다’는 해명 중 ‘주변’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이번 수사가 진작 진행됐어야 했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최재원 부회장의 비리를 간파한 지 4개월이나 지나서야 진척을 보였다는 것이 오히려 SK와 최 회장 측에 시간을 벌게 해준 것 아니냐는 질타다. 한상대 검찰총장이 과거 최 회장과 함께 테니스를 자주 즐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데다 한 총장의 처남이 SK 계열사 상무로 있으며, 검사 출신인 윤진원 SK그룹 회장 비서실장(부사장)이 한상대 총장의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시절 부부장검사였다는 점도 의혹을 증폭시키는 대목이다.
설사 최태원 회장이 형사처벌을 면한다 해도 그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재벌 회장이 5000억 원 규모로 선물투자를 즐기다 1000억 원대 손실을 본 것도 씁쓸한 일인 데다 이를 비자금으로 마련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 뻔하다. 평소 사회공헌에 힘써왔던 모습도 한순간에 ‘가식’으로 인식될 수 있다. 여론이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트위터 등에는 최 회장을 비난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이런 차에 SK는 지난 10일 하이닉스 인수 본입찰에 단독으로 참여, 11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고심을 거듭하고 시너지효과가 없는 것 등의 이유로 사외이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막판에 최태원 회장이 결정했다는 것이 SK 측 설명이다. 하이닉스 채권단은 다음날 곧바로 “SK가 써낸 가격에 문제가 없다”며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주식매매계약(SPA)도 신속하게 체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정난 셈이다.
SK의 단독 참여와 신속한 인수 결정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입찰 포기에 대한 우려가 검찰 수사로 일거에 해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성민 SK텔레콤 사장 등이 하이닉스 인수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온 터다.
현 정부 들어 SK그룹과 최태원 회장은 ‘바람 잘 날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룹의 두 축인 통신과 에너지사업이 끊임없이 규제와 질타에 시달렸다. 내수 위주 사업에서 탈피하기 위해 중국사업 등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하이닉스를 인수해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려 하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게다가 2003년 분식회계와 배임, 증권거래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받은 이후 8년 만에 오너 일가의 검찰 소환이 이뤄질 예정이다. SK그룹과 최태원 회장에게 언제쯤 볕이 들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