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어린 시절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되는 존재가 나를 든든히 지켜주어야 하는 시절, 선악보다는 호불호가 중요하고 책임감보다는 호기심을 인정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시절, 그 시절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는 인생의 밑그림이다.
그 시절이 없이 일찍 철이 나야 하는 아이들은 평생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할까 조급하게 동동거린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코가 꿰거나,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주류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아니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존재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를 그린 그림 중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이다.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아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아기의 공간에 걸맞게 주변이 온통 따뜻하다. 따뜻한 노란 빛을 완성하는 것은 엄마의 따스한 눈빛이다.
아이는 엄마의 따스한 품이나 아빠의 훈훈한 표정 같은 것 없이 세상을 믿게 되지 못한다. 엄마가 조급하면 아이는 불안이 많은 인간이 되기 쉽고, 아빠가 공감에 인색하면 아이는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다가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인간이 되기 쉽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는 일은 어른들의 의무라 생각한다. 일곱 살 된 아이가 영어 배우고, 태권도 배우고, 그림 배우고, 피아노 배우고, 심지어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바둑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일곱 군데나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김지하 선생의 ‘무화과’는 내게는 꽃 시절이 없었다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예 싹 시절이 없는 것 같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을 거두어들일까. 혹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과 화해해 보자. 당신의 엄마, 아빠는 어땠는가? 엄마, 아빠라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당신이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도란도란 어린 시절의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며 불러내며 우리 속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느껴보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사춘기 때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어떤 모습인지,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원형이 보인다.
기억이란 묘하다.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와 함께한다. 그래서 나의 과거와 노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과 잘 놀다보면 지금의 나의 그늘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잘 놀 수 있는 때가 오지만, 내가 나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하는 한 나는 나의 그늘 아래서도 쉴 수가 없다.
수원대 교수 이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