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은 지난 6월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강빌딩에 있는 인동초평화포럼 사무실에서 문 전 의장을 만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할 때 나지막했던 그의 목소리는 민주당 쇄신 등 민감한 정치 현안을 토로할 때 쩌렁쩌렁 울렸다.
―지난 3·9 대선과 6·1 지방선거를 평가해 달라.
"민주당이 지방선거를 진 건 대통령 선거에서 졌기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하고 22일 만에 선거 치른 예가 없다. 대통령 선거는 왜 졌느냐 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 의미,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서) 누가 잘못했고 당이 어떻고 백날 설명해봐야 결국은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이 큰 거였다. 우리 국민들은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판단됐을 때 스스로 나서서 고쳤다. 그게 역사상 세 번 있다. 자유당 독재를 보다 못해 나온 게 4·19 혁명이다. 군사독재에 항거해 국민이 결정적으로 일어나서 바꾼 건 6·10 항쟁이다. 그렇게 될 때마다 체제가 완전히 바뀌었다. 헌법을 고쳤고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개혁 바람이 불어왔다. 세 번째는 이명박·박근혜 제왕적 대통령 권력에 의한 폭정이었다. 1700만 촛불이 나서서 세상을 뒤집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이 컸던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나.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탄핵된 상태에서 보궐선거처럼 만들어진 선거에서 전 국민적 염원으로 출범했다. 촛불혁명이 일어난 근본 원인에 대한 수습, 제도적 보완에 앞장섰어야 했다. 국정농단을 만든 제왕적 대통령제를 엎는 제도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게 개헌이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책을 모조리 뒤집기만 하니깐 적폐청산이 됐다. 적폐청산은 전광석화처럼 1년 만에 해치워야 했다. 나는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정치보복으로 보기 시작하고 개혁의 동력이 상실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 결국 적폐청산을 5년 내내 했다. 그러다 보니깐 교조주의, 원칙주의로 흘러갔다. 국민에겐 독선과 오만으로 비쳤다. 자기네만 잘났다고, 자기네들끼리만 다 해 먹었고. 실제로 하는 일은 내로남불이었다. 이렇게 돼서 국민과 이반되기 시작했다. 국민 신뢰를 상실하면서 정권이 무너졌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신을 잊어버렸다."
―선거에 연패 했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선거는 끝나면 책임 문제를 얘기한다. 정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노력한다. 국민에게 잘 보이려고 정책과 비전을 제시한다. 정권을 잡아야만 자기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게 목표다. 그런데 졌다. 한 표를 져도 진 거다. 졌지만 잘 싸웠다, 그건 소용없는 말이다. 자기들끼리 위로할 때 쓰는 말이다. 국민 앞에 할 말이 아니다. 졌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책임진다고 그러면 아무도 책임을 안 지겠다는 얘기다. 누구 책임이 제일 크냐 하면, 두 사람이다. 하나는 후보다. 하나는 당이다. 당대표. 상징성 때문에 그만두는 거다. 책임을 지는 차원이다. 물론 제일 큰 책임은 문재인 정권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만두고 가지 않느냐. 실질적으로 두 사람이 현실적인 책임자다. 그런데 지자체 선거에 이 두 사람이 (후보로) 나왔다. 급하니까 당장 선거를 치르고 봐야 하니까 전면에 나선 거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어떤 전략으로 지방선거를 치렀어야 했나.
"대통령선거 연장전처럼, 패배한 선거를 2막으로 이어가는 선거 전략을 쓰니 필패였다.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어버렸어야 했다. 지역인물론, 지역발전론을 강조해야 했다. 현직 시장, 군수, 시의원 중 다시 공천 받아 나온 사람이 많았다. 중앙정치와 관계없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잘했다고 평가받았다면 전략을 그렇게 몰고 가야 했다. 아까운 사람이 충청남도 (도지사 후보) 양승조다. 지역을 많이 발전시킨 사람이다. 그런데 중앙선거 연장선이니깐 도미노처럼 떨어졌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서울시장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오니까."
―민주당이 향후 어떻게 쇄신해야 한다고 보나.
"김대중 정신, 노무현 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기본이다. 아이덴티티를 회복해야 한다. 국민과 함께, 국민보다 반걸음 앞에 서야 한다.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까지 가졌던 게 김대중 정부다. 민생으로 들어가서 민생을 보살펴야 한다. 정치의 가장 근본은 배고픈 사람 배부르게 하고, 등 시린 사람 따습게 하고, 억울한 사람 눈물 닦아주고, 정 힘이 없으면 같이 울어주는 거다. 국민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면 망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 대통령은 띄워진 배일 뿐이다. 배를 띄우는 건 물이다. 국민은 물이다. 배를 뒤집는 것도 국민이다. 국민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게 김대중 정신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 동학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왕처럼 하늘처럼 국민을 떠받들고 정치를 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이) 교만한 거다. 오만과 독선에 빠졌다. 원칙주의, 교조주의에 빠져서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고, 저 친구는 민주주의의 적인 사람이라는 게 몸에 뱄다. 그러다 자기네들이 기득권이 됐다. 그걸 빨리 깨달아야 한다."
―지방선거 후 민주당 안팎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거명됐는데 고사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현 민주당 지도부 포함해서 나한테 전화를 해왔다. (나는) 못한다고 했다. 첫째 건강이 허락지 않는다. 이제 나는 은퇴했다. (민주당) 상임고문만 허락했다. 그거는 지울 수 없다. 이건 나의 궤적이자 삶의 흔적이다. 당원 자격과 상임고문 직함만 갖고 있다. 그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대위원장은 집행 권한이 있고 예산을 쓸 수 있다. 그건 절대 안 한다."
―특정계파에 치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 차례 비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때만한 열정이 없다. 그땐 에너지가 충만했다. 의욕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대위원장을 하면 안 된다. 열정을 가진 사람이 사심 없이 욕심 없이 일할 사람이 딱 들어가서 해야 한다."
―민주당 안팎에서 세대교체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86그룹(80년대 학번·1960년대 출생) 용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세대교체를 인위적으로 주장해서 성공한 적은 없다. 그 말을 처음 정계에서 쓴 건 5·16 세력인 김종필이었다. 군인들이 유신(維新) 옹호하려고 나와서 전체 시장, 군수를 장악했다. 그러고서 세대교체라는 말을 썼다. 그 전에 40대 기수론이 있었다. 40대 기수론은 순리로 저절로 된 거다. 40대가 나서서 하자, 이렇게 주장해서 된 게 아니다. 도전해서 붙어서 선출된 거다. 인위적으로 몇 십 대 이상은 물러나라 해서 된 게 아니란 말이다.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지금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강물은 뒷물에 의해서 저절로 밀려난다.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다. 그게 순리다. 세월에 따라, 흐름에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 판단은 역사가 하고 국민이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도전해서 선거로 이기라 그거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그렇지 않았나. 국민이 당원이 뽑아줬다. 그래서 그걸 눈여겨본다. 중요한 흐름의 변화다."
―민주당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명(친이재명), 친문(친문재인) 계파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계파는 자유민주주의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파가 싸움 하는 게 민주주의다. 싸움이 인정 안 되면 안 된다. 절대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된다. 그게 없으면 죽은 정당, 식물정당이다. 그런데 그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계파 패권주의가 있다. 어떤 계파가 자기들끼리만 만나고, 당권을 전부 소유한 다음에 비주류는 하나도 안 주고 공천권도 싹 독점하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붙어야 한다. 암수(暗數, 남을 속임)를 쓰거나, 이를테면 상호비방전 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 지금 같은 경우 난파선 위에서 싸워서 이겨 선장이 되면 뭐 하나. 배가 가라앉는데. 배가 가라앉을 땐 힘을 합쳐야 한다. 부정적으로 배제하는 싸움 하면 안 된다. 동지로 대통령선거 같이한 사람끼리 그러면 되겠나. 정책대결을 하고 대안을 내세우면서 토론으로 당당하게 싸우라 이거다. 누가 누굴 책임지라고 하느냐. 그런 식으로 너네 나오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재명 의원이 8월 전대에서 당대표 선거 출마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불릴 때까지 기다리고 참아야 한다. 국민이 부르고 당원이 부를 거다. 그런 시절이 반드시 오게 돼 있다. 당내 기반은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다. (6·1 지방선거) 선거대책위원장이고 자기가 (인천 계양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나가고 이랬으면서 당대표 선거에 또 나오면 국민이 '아니, 그 사람은 뭐 하자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이재명 의원이 나에게 물어보면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권할 거다. 이재명 의원이 김대중정치학교에서도 공부하고 싶다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했다. 순수한 모임이 잘못되면 계파싸움장이 될 수 있다. 지금 현역 의원이 20명 정도 (김대중정치학교에) 있다. 친명도 있고 친문도 있고 이낙연계도 있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이재명계는 있지만 이재명은 안 된다. 이재명 의원은 너무 핵심인물이다. 뜻은 이해한다고 했다. 이재명은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 여론과 함께 가야 한다. 못 참고 폴짝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당대표 출마) 하면 이재명이 당권 잡는다. 대통령 후보가 될지는 다음 문제다. 절대 대통령 후보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왜냐면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 줄 아느냐."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 출신들을 중용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자칫 공안정국으로 갈까봐 걱정스럽다. 이미 낌새가 그렇다. 무슨 금감위원장을 검찰 출신을 앉히나.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런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회계사 자격증이 있다면서. 물론 검사들 유능하고 똑똑하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자기 측근, 그중에서도 과거 인연 있는 사람만 골라서 부인이나 장모 변호사였던 사람까지 기용한다는 거다. 법치주의 이름을 쓴 공안정국이다. (역대) 군사정부도 계속 법치주의라고 주장했다. 법치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국회에 대한 존중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인정해야 한다. 의회 대표가 국민 의지를 묶어서 룰로 만들면 그 법률을 왕도 지켜야 한다. 이게 민주주의 뿌리다. 법치주의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 히틀러도 법치주의라고 했다. 의회에서 법을 만들어서 유대인을 학살했다. 다 법률에 따라서 했다. 그게 공안정치다. 그래서 무섭다. 이미 싹수가 노랗다. 사람 임명하는 것도 그렇고. 행정에서 법 단계론이라는 게 있는데, 대통령령으로 정부조직법상 할 수 없는 걸 통과시켰다. 그러고 나서 법무부 장관 밑에 인사검증단을 만들었다. 정보를 독점하겠다는 거다. 다른 독립기관도 아니고 국정원도 아니고 법무부 장관 밑에 갖다 놓았다. 법률 위반이다. 법치라는 건 인위적으로 사람이나 힘으로 법을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의회를 무시하면 법치주의가 아니다. 의회를 존중하고 거기서 만드는 법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의회주의다. 의회주의가 위협 받고 있다."
―왜 지금 김대중 정신, 김대중정치학교인가.
"김대중 정신 요체는 통합과 평화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 격차 해소, 동서 통합을 몸으로 체득해서 평생을 지냈다. 지역차별은 상상을 초월한다. 호남에 대한 괄시가 뼈저릴 정도로 조선 때부터 계속됐다. 그거를 막판에 뒤집은 양반이 김대중이다. 그게 통합 정신이다. 지역 하나만 얘기했지만 세대도 여야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대통령에겐 두 가지 인사 원칙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다르게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가져다 쓴다는 생각은 두 번째 원칙이었다. 첫 번째는 무조건 탕평이었다. 지역·성별·직업 안배 다 고려해서 했다. 그걸 체크하라고 중앙인사위원회를 법률로 만들었다. 요새 인사혁신처가 하는 일이다."
"DJ 정신을 배워라" 김대중정치학교 개교
김대중정치학교는 15대 대통령이자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정치, 정책, 리더십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아카데미다. 지난 4월 1일 (재)김대중기념사업회(이사장 권노갑)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위해 김대중학술원과 김대중정치학교를 창립하기로 결의한 데서 비롯됐다. 우선 6월 17일 김대중정치학교를 개교하고 김대중학술원은 오는 9월 1일 개원할 예정이다.
김대중정치학교 1기 과정은 6월 17일부터 9월 30일까지 3개월간 진행된다.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모두 12개 강좌가 열린다. 강사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 임동원·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 임창렬 전 경제부총리, 김성재·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 심상정 정의당 의원, 김영록 전남도지사, 박명림 연세대 교수,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백학순 전 세종연구소장 등이다. 김대중 정신과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김대중정치학교 교장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김대중정치학교 1기에선 정치와 리더십 등 김대중 정신,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와 외교·안보, 경제와 노동, IT(정보통신) 산업,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김대중 대통령 철학이 이 나라에 어떻게 구현됐는지,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당시 국정운영에 참여했던 강사들의 생생한 강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정치학교는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빌리 블란트 수상을 배출한 독일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또 미국 클린턴재단 등 국제 여러 기관과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