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되지 않은 ‘장르의 만화경’…관객들을 유혹하는 138분의 최면향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벌어진 한 중년 남성의 변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해준(박해일 분)이 피해자의 젊은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고,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연기하는 두 배우들의 합도 그렇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모순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유머 센스는 음울하고 눅눅한 극의 분위기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며 관객들을 완벽하게 최면 시킨다.
극 중에서 서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모호한 인물로 등장한다. 남편을 잃었음에도 슬퍼하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해준을 쥐락펴락하며 유혹 아닌 유혹을 하지만 악녀라고 보기엔 어쩐지 애매하다. 주어지지 않은 삶까지 다 살아본 사람처럼 노회한 얼굴을 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한없이 천진하고 무구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나 도덕의 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에게 감화되면서 해준은 고질적인 불면증조차 서래로 인해 씻은 듯이 치유됐다고 느낀다.
수사를 진행하며 해준의 관심과 의심이 깊어질수록 서래의 과거 행적이 하나씩 드러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관객은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게 된다. 특히 ‘헤어질 결심’에서는 불면으로 인해 건조하고 지친 해준의 시야를 관객들과 공유하고, 맑은 눈으로도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 이야기의 결말을 속단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서래라는 인물의 캐릭터성과 이 같은 장치들이 합쳐지면서 이 이야기의 최면 효과를 배가시키는 셈이다.
한편으로 서래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분명한 감정은 그가 상대를, 또는 자신을 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해준을 만난 뒤부터 이를 고뇌해 왔다는 점이다. 이렇게 상호적이면서 이타적이고 동시에 이기적이기도 한 둘의 모순적인 관계성은 앞서 박찬욱 감독이 설명한 것처럼 이 작품을 “100%의 수사 드라마와 100%의 로맨스 드라마”로 자리하게 하며 도합 200%의 만족감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격정이 비운 자리에 들어찬 은폐된 감정도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 관객들이 새롭게 볼 포인트다. 이 작품엔 넘치는 사랑의 감정에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가슴 아픈 배신에 치를 떨며 오열하는 ‘오버’가 없다. 극 중 해준과 서래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방향대로 감정을 구토처럼 뿜어내기보다 잠들기 전 내뱉는 깊은 숨만큼이나 무겁고 잔잔하게 내려놓는다. 서로가 품어왔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난 순간과 그 뒤로 결말로까지 이어지는 긴 시퀀스에 더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것도 박찬욱 감독의 이런 새로운 시도 덕으로 보인다.
21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헤어질 결심’ 시사회에 참석한 박찬욱 감독은 “처음에 의도했던 건 (관람)등급이 무엇이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어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그런 마음을 먹었을 뿐”이라고 제작과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이야기’라고 하니까 ‘노출도 굉장하고 강한 영화겠네’ 라는 반응이 왔다. 그때 반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오히려 어른들의 이야기이니만큼 어떤 격정,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보다 은근하고 숨겨진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를 하려면 자극적인 요소는 낮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미스터리한 여인 서래에게 끌리기 시작하는 형사 해준을 맡은 박해일은 “감독님이 ‘어른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배우가 표현해야 할 감정의 톤이 어떨지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형사인 해준이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감정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관계이기에 해준은 가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의심을 하며 진심을 파악하기도 한다.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감정을 변주해 갔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서 첫 한국어 연기에 도전한 서래 역의 탕웨이는 “박찬욱 감독님이 말했듯이 사람은 성장하는 단계에서 표현하는 방식은 점점 성숙해진다. 서래는 생활 속에서 고난을 겪고 그녀가 경험하는 삶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표현하기 어렵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고 숨겨야만 하는데 숨겨야 더 크게 표현되는 인물이었다”라며 “오히려 내 감정을 안으로 더 가지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교묘하고 기묘하게도 박찬욱 감독님의 연출과 맞아떨어졌다”라고 설명했다.
박찬욱 감독은 서래라는 캐릭터가 흔한 ‘팜 파탈’의 정석처럼 여겨지지 않길 바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형사와 아름다운 여성 용의자가 밀고 당기는 두뇌 게임을 한다는 설정은 흔한데 이런 장르 안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있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며 “나는 적어도 영화가 절반을 지나갈 때까진 관객들이 ‘내가 보는 영화가 이런 영화구나’라고 짐작하고, 그 후에 ‘내 선입견과 영화가 다르게 흘러가네’라고 깨달으며 즐거움을 얻기를 바랐다. 서래를 흔히 말하는 팜 파탈로 단정하고 지레짐작하다가 종국에는 ‘내가 저 여자를 잘못 봤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연출 의도를 부연했다.
한편 ‘헤어질 결심’은 오는 29일 개봉한다. 신마다 녹아있는 박찬욱 감독만의 유머 센스와 더불어 ‘이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라고 놀랄 만한 면면들에도 주목. 138분, 15세 관람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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