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상태 노출되는 게 싫어 아무도 못 만지게 해…건강한 왼팔과 두 다리에 감사”
최근 은퇴를 발표한 KT 위즈 안영명(38) 이야기다. 안영명이 상완신경총 손상으로 고생한 내용은 이강철 감독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안영명은 프로의 세계에서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공을 던지기 전 글러브 안에서 손의 경련을 느낄 때, 공을 잡고 있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질 때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마운드를 지켰다.
안영명은 2003년 5월 18일 데뷔전부터 2022년 5월 13일 마지막 등판까지 통산 575경기에 나서 62승 57패 16세이브 62홀드 평균자책점 4.90을 기록하고 퇴장했다.
얼마 전 안영명은 개인 SNS에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야구 인생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 그가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상 부족함을 알고 보완하고 연구하길 반복했던 20년이었다.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실패했다. 실패한 야구 인생이었다. (중략) 캠핑을 할 때 장작불을 떼다보면 불길이 화려하게 솟구쳐 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장작은 모두 타고 숯이 되어 바닥에 남는다. 그 숯은 앞으로는 불길을 뿜지 못 하지만 더 강한 온도를 가지고 있다. 투수로 수명을 다한 나 역시 앞으로 화려할 수 없겠지만 마음속에 더 뜨겁게 야구를 사랑하고 열망할 것 같다’
안영명은 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SNS에 올린 글과 관련해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쓰고 싶었지만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캠핑을 좋아한다. 장작불을 피우다 보면 탁탁 소리가 나면서 나무가 활활 타오르지 않나. 그 장면이 정말 멋있지만 더 깊은 멋을 주는 건 불길이 사라지고 뻘겋게 숯으로 남은 장면이다. 불길을 내뿜진 못해도 숯으로 남은 역할을 해주는 모습이 마치 내 야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퇴 인사를 장작불에 비유했다.”
그는 ‘투수로 수명을 다 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자신이 오른팔 근육 없이 공을 던진 1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마침표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한 선수가 후배들한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걸 싫어한다. 선수라면 끝까지 경쟁해서 이겨야 하고, 자리를 안 뺏겨야 하고, 좋은 자리를 뺏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물러서는 것이다. 은퇴를 결심하기 전 나의 현실을 돌아봤다. 구속이나 제구, 경기 운영 등이 리그 평균 이하로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다보니 경쟁력도 없었고, 점차 패전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다 보니 자존감이 떨어지더라. 더 이상 욕심이나 미련을 두지 말자고 생각했다.”
안영명의 선수 생활 마지막 등판은 5월 13일 수원 키움전 8회 초였다. 당시 안영명은 1이닝 1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김태진을 좌익수 플라이로 잡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경기가 나의 마지막 등판이 될 줄 몰랐다. 미리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감정이 격해져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지 못 했을 것이다. 올 시즌 모두 4차례 등판했는데 이상하게 첫 등판 때부터 한 타자 상대할 때마다 포수 한 번 쳐다보고 하늘 쳐다보고 두 번째도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마지막 김태진을 상대하고 내려올 때도 하늘을 쳐다봤다. 이게 마지막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안영명은 다음 날 2군행을 통보 받았다. 그는 곧장 이강철 감독과 면담을 갖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마침 그날이 유한준 선배 은퇴식이었다. 은퇴식 전에 전광판을 통해 선배의 경기 영상들이 나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 (유)한준 선배의 은퇴식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후 감독님과의 면담을 통해 은퇴 의사를 전달했고, 라커룸으로 돌아가서 후배들에게 은퇴 소식을 알렸다.”
시원섭섭하기 보단 오히려 시원했다고 말한다. 지인들은 통산 575경기에서 25경기를 더 채워 600경기 마치고 은퇴하길 바랐지만 안영명 입장에선 그 자체가 욕심일 뿐이었다.
“구속이 150km/h가 나와도 은퇴하는 선수가 있다. 난 이 팔로 내가 갖고 있는 역량을 다 쓰고 은퇴했다. 하얗게 불태운 셈이다. 그래서 은퇴 발표가 아쉬움보다는 시원했던 것 같다.”
KIA 시절이었던 2010년 마무리 훈련 때였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던 중 기구를 드는데 팔이 들리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후배들 보기 창피스러울 정도였다.
“기구를 들면 팔이 찌릿찌릿했다. 속으로 ‘이게 뭐지?’ 싶었다. 병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는데 담당 의사가 상완신경총 손상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상반된 소식을 전했다. 어깨와 팔꿈치 부위에 자리한 신경다발이 있는데 이 신경을 근육이 누르고 있지만 다행히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 근육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할 의사를 찾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까지 나서 일본의 병원을 수소문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김상수 박사님을 알게 됐다. 2012년 김 박사님한테 수술을 받고 근육 경련이 사라졌다. 박사님은 나중에 재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
안영명은 수술 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신했다. 다시 팀에 복귀하기 전까지 지독한 재활 훈련을 소화하며 조용히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는 “주위에서 복귀가 어려울 거라고 말할 때마다 더 독기를 품게 됐다”고 말한다.
2014시즌을 앞두고 소집 해제를 통해 한화에 복귀한 안영명은 2015년 한화에서 6년 만에 10승을 거둔다. 구속은 더 빨라졌고, 125와 3분의 1이닝을 소화할 만큼 건강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렇다고 팔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매 시즌마다 구속이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3년 전에 다시 김상수 박사님을 찾아가 정밀검진을 받았는데 일반인이라면 완치 수준이지만 야구 선수라 여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전에는 열이 통하지 않아 손이 하얗게 됐다면 지금은 열이 통해도 신경이 자라는 속도가 굉장히 느려 근육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공을 던지려고 세트 포지션을 할 때 갑자기 경련을 느낀 적이 많았다. 나중에는 그런 증상조차 무덤덤해졌다. 팔 상태가 그렇다보니 누군가 내 팔을 만지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근육이 없는 팔 상태가 노출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건 순전 나만의 콤플렉스였고, 그 콤플렉스가 알려지는 게 싫었다.”
기독교 신자인 안영명은 기도할 때마다 남은 왼팔과 두 다리가 온전한 상태라는 걸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팔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이강철 감독이 2020시즌 마치고 한화에서 방출된 후 오갈 데 없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부분에 감동했다.
“감독님이 내 팔 상태를 알고 계시면서도 나를 영입하는 걸 반대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 그동안 한화에서 보여준 부분도 있었고, 베테랑 투수로서 다른 후배들을 잘 이끌어가길 바라신 것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다. 그리고 은퇴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내 팔 상태를 고려하셨기 때문에 잘 이해해주셨다. 이강철 감독님의 그 배려는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
안영명의 은퇴가 선수들에게 알려진 날, KT 고영표는 다른 투수들과 함께 조촐한 송별회 자리를 마련했다. 안영명은 “외국인 선수들인 쿠에바스, 데스파이네까지 모두 참석했다”며 그날의 감동을 떠올린다.
“(고)영표가 이대로 떠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투수들과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외국인 선수들까지 다 참석해서 고기도 먹고 2차로 호프집에도 가는 등 잊지 못할 시간을 가졌다. 배제성은 어머니 생신이었는데 늦게 합류했다. 데스파이네가 “넌 우리 팀의 레전드”라며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해주더라.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선배의 은퇴를 아쉬워하고 덕담을 건네는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
2003년 천안북일고를 졸업하고 1차 지명으로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던 안영명은 2010년 이범호의 보상 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뒤 1년 만에 다시 한화로 돌아왔다. 이후 2020시즌이 끝난 뒤 한화를 나와 2021년 KT 유니폼을 입고 35경기 1패 4홀드 평균자책점 4.08로 활약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봤다. 올 시즌에는 4경기에만 등판해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했다. 은퇴한 안영명은 평소 해온 심리학공부를 통해 멘탈 코치로의 도전을 준비 중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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