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곡동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게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1월에 제정된 이 법은 박 대통령이 퇴임을 생각지 않았던 탓이겠지만 10년 넘게 사문화된 상태였다. 이 법에 첫 손질이 가해진 것은 박 대통령 서거 후 신 군부가 집권한 뒤인 1981년 3월이었다.
이 법에 ‘직전 대통령은 국정자문회의 의장이 된다’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신 군부의 압력으로 물러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가책의 표시였을 것이다.
이 법이 내곡동 사건보다 요란하게 주목을 받았던 때는 1988년 2월이었다. 퇴임을 코앞에 둔 전두환 대통령이 국정자문회의 조항을 고쳐 명칭도 ‘국가원로자문회의’로 하고 사무국을 두는 등 기능도 강화했다. 후임 노태우 대통령 측이 노골적인 섭정 의도라고 반발했고 비난여론도 비등했다. 결국 노 대통령 취임 후 이 개정시도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 법은 전직대통령의 연금지급 외에 경비 및 경호, 교통 통신 및 사무실 지원, 본인과 가족의 치료 등의 예우조항을 담고 있다. 다른 예우들과는 다르게 경비 경호 내용은 기밀로 돼있다. 퇴임 후 7년은 경호실에서, 그 후는 경찰에서 맡는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부지의 차명매입과 과대 경호시설로 비롯된 내곡동 사건도 그런 기밀의 허점에서 불거졌다.
전두환 대통령 퇴임 후 그의 연희동 사저 앞은 연일 시위현장이 되었다. 시위저지를 위해 2개 중대에 이르는 상주병력이 동원됐다. 12·12, 5·18 같은 유혈사태를 거쳐 집권했으므로 그에 대한 위해의 가능성은 상존했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의 백담사 유배 조치도 위해방지가 주목적이었다.
전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들은 주민들의 축하 속에 사저로, 고향으로 복귀했다. 큰 문제없이 주변의 이웃들과 어울려 살고 있거나, 그렇게 살다가 타계했다. 그중에서도 생전의 최규하 대통령은 검소한 성품대로 경비경호를 사양하다시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의 사저가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간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퇴임 후의 평민 복귀의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됐던 노 대통령이 자살한 것은 그 점에서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이 은퇴 이후 신변의 위해를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전직 대통령들의 예를 보면 자명해진다.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미래의 모든 대통령에게도 해당되리라는 것 또한 자명하다.
따라서 경호 인력을 줄이고, 경호시설도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일을 하기에 시기적으로도 적임이다. 내곡동 사건을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길이다. 경호원 없이도 이웃과 어울려 살 수 있을 때 전직 대통령의 평민귀환은 완성된다. 그런 대통령을 보고 싶다.
한남대 교수 임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