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로맨스 남주의 ‘새로운 멜로’ 주목…“상대역 탕웨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결과 내는 배우”
“감독님과 저희 작품이 뭐라도 하나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죠. 왜냐면 박찬욱 감독님의 전작들이 대부분 칸에 초청 받았을 때마다 수상을 하셨거든요. 제가 이번에 처음 같이 작품을 했으니 이 작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시면 제가 민폐가 안 된 거잖아요(웃음). 일조하고 싶다는 그 바람이 좀 해소되는 자리였으면 좋겠단 생각에 혼자 마음 졸인 게 좀 있었어요. 그래서 수상을 하셨을 때 딱 ‘이젠 됐다!’(웃음). 더불어 송강호 선배님까지 같이 동시에 수상을 하셔서 ‘이게 국내 영화젠가?’ 싶을 정도였죠(웃음).”
박해일을 만나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던 이야기는 역시 ‘칸 국제영화제’였다. 5월 28일 폐막한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박찬욱 감독과의 첫 작품, 그리고 본인에게도 첫 칸 영화제 진출이었던 만큼 수상의 여운이 남달랐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느덧 칸의 열기는 한 달 전의 이야기가 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해일은 서서히 일상이 정상화되고 있는 영화계에 맞춰 바쁜 홍보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해준에게 저를 장착시키실 때 정말 수많은 양복을 입혀 주셨어요. 거기서 ‘해준스러운’ 느낌을 찾으려 하셨던 것 같아요. 형사 이미지에 맞는 구두 색의 운동화를 신어보거나, 그냥 클래식한 구두를 신어 보기도 하고. 그런 반면 스마트워치로 녹음을 해서 증거나 자료를 메모한다는, 클래식하지만 테크놀로지한 부분도 활용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죠. 해준을 보면 상의에 열두 개, 바지에 여섯 개의 주머니가 있거든요. ‘준비된 남자’의 모습이에요. 순간순간에 맞는 뭔가를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는 걸 극적장치로 녹여내신 거죠.”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형사 장해준 역을 맡았다. 산에서 발생한 변사 사건을 추적하던 중 사망자의 아내이자 용의자로 지목된 중국인 여성 송서래(탕웨이 분)를 만나게 되면서 그에게 묘한 관심과 의심을 동시에 품으며 감정의 이끌림을 멈추지 못하는 인물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가진 남편, 회사에서는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사로 인정받지만 속내는 깊은 불면증과 사건들에 대한 집착으로 곪을 대로 곪은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줄곧 꼿꼿하고 단정했던 그가 시간 흐름에 따라 초췌하고 피폐해지는 모습은 그를 연기한 배우가 박해일이기에 더 견고한 당위성이 부여되는 것만 같다.
“해준은 이야기의 순서대로 변화하는 캐릭터죠. 잔잔한 파도였던 감정의 파고가 진짜 말 그대로 해일이 몰아치는 느낌으로 감정이 변해요. 자기 직업의 품위와 자긍심을 가진, 좋은 가정도 갖춘 인물이 송서래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래탑처럼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죠. 진짜 ‘붕괴’라는 단어를 쓰는 상황까지 벌어지는 인물이에요. 사실 연기하기엔 쉽지 않지만, 매력 있죠. 배우로서는….”
해준은 형사라는 직업과는 살짝 동 떨어진 말투를 쓰는 독특한 캐릭터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모든 캐릭터가 이런 말투를 쓴다면 그것은 박찬욱 감독의 색이지만, 해준만이 이런 위화감을 가진다. 다른 캐릭터들은 해준이 그런 말을 쓸 때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그가 다른 이들과 다소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일깨워 준다.
“형사라는 캐릭터와 충돌되고 모순되는 말의 내용과 단어를 보면 굉장히 문학적이고 시적이잖아요. 저도 이번 작품에서 형사 역도 처음인데 그런 말투를 쓰는 캐릭터도 처음이거든요. 그래도 낯설거나 불편함으로 다가오진 않고 굉장히 흥미롭고 호기심이 강한 질감으로 다가왔어요. 상대역인 서래는 한국어가 부족한 중국인 역인데, 그래서 그녀가 말하는 독특한 한국어를 제가 또 맞춰주죠. ‘마침내’, ‘단일한’, 이런 문어체적 대사들을 보면 서로의 동질감을 채워주는 것 같아요. 그런 관계들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님이 써내신 대사가 아닐까요?”
이번 작품은 박해일에게 ‘처음’의 연속이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것도, 그리고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배우와 이렇게 긴 시간 호흡을 맞춘 것도 처음이었다. 특히 탕웨이와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박해일이 가장 긴장했던 건 “해준을 연기할 박해일이란 배우를 탕웨이가 어떻게 생각할지”였다고 한다. 그렇게 촬영을 무사히 마친 뒤 박해일은 탕웨이를 “자기만의 고집이 있는 배우”라고 설명하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강조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탕웨이 씨는 자기만의 방식을 꽤 고수하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배우였던 것 같아요. 촬영 전에 제게 해준의 대사를 녹음해 달라는 말을 했는데, 대본 리딩할 때 탕웨이 씨가 가져오신 대본을 보니 한국어, 중국어, 영어 버전이더라고요. ‘우와, 정말 어려운 감정을 겪고 그걸 한국어로 내뱉게 되는구나. 그런 촬영이 앞으로 펼쳐지겠구나’ 싶어서 얼른 녹음해다 줬죠. 그리고 잘됐다 싶어서 저한테도 중국어 대사를 녹음해 달라고 했어요(웃음). 그 배우가 어떻게 송서래를 보여줄 것인지 감을 잡고 싶었거든요.”
각자 맡은 역에 깊이 몰입하고 있을 때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배우의 뒤에 캐릭터의 얼굴이 언뜻 보이기도 한다. 박해일 역시 탕웨이에게서 그런 모습을 포착한 에피소드를 꺼내며 웃음 지었다.
“부산에서 저희가 촬영을 오래 했는데 어느 날 탕웨이 씨가 촬영하다 발목을 접질리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목발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해변을 산책하다가 그 근처 화단에 탕웨이 씨가 마스크를 쓴 채 앉아 있는 걸 우연히 봤거든요. 근데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이는 거예요, 다들 (탕웨이인 줄 모르고) 그 앞을 그냥 지나가 버리니까(웃음). 옆에 앉아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왠지 그날은 탕웨이 씨가 그냥 송서래 같았어요. 캐릭터에 깊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아서 그냥 ‘하이’만 하고 쓱 지나갔죠(웃음).”
해준과 서래, 둘 사이의 긴장감이 멜로와 스릴러라는 상반된 두 장르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이 작품은 ‘박해일의 멜로’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족적을 남기게 됐다. ‘국화꽃 향기’(2003), ‘연애의 목적’(2005), ‘은교’(2012), ‘경주’(2014) 등으로 로맨스 남주의 면모를 보여 왔던 그가 40대에 보여준 새로운 형태의 멜로라는 점에서 이 시도는 더 무겁고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까지 그가 켜켜이 쌓아 온 멜로의 지층이 비로소 하나의 산으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이번 작품에 멜로가 달리 보이는 건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이기 때문이겠죠. 다른 이유로는 제가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거(멜로)라서 그 사이사이에 겪은 다른 필모그래피들도 작용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제 개인적인 삶의 시간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웃음). 상대의 기운을 받는 부분들의 결과 폭의 차이가 생겨서 작품을 대하는 부분에도 차이가 생겼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이 경험들이 또 다음 작품 어딘가에서 잘 활용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영화 안에서 남녀가 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노소는 상관없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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