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총성 울리자 앞으로 ‘푹’
7월 8일 오전 11시 20분. 아베 전 총리를 태운 차량이 나라시 야마토니시다이지역 앞에 도착했다. 흰색 와이셔츠와 감색 정장 차림의 아베가 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자, 청중들로부터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참의원 선거를 이틀 앞두고 지원 유세를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날은 별도의 유세 차량이 아니라, 일반 도로에 낮은 받침대를 올려놓고 연설이 시작됐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베 신조입니다.” 오전 11시 29분. 전 총리가 왼손을 들어 올리며 수백 명의 청중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야마가미 용의자는 차도를 사이에 두고 약 15m 떨어진 곳에서 검은색 가방을 메고 반팔셔츠 차림으로 서 있었다. NHK가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아베 전 총리를 향해 박수를 치는 용의자의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연설이 시작된 지 약 2분 후. 거무스름한 통 같은 것을 손에 쥔 야마가미 용의자가 아베 전 총리 뒤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7~8m까지 거리가 좁혀졌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기색이 없었다.
후보자의 실적을 소개하던 아베 전 총리가 “그는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중 갑자기 ‘펑!’ 소리가 나며 불꽃이 터졌다. 총성과 함께 주위에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베 전 총리가 선 채로 뒤를 돌아봤다. 이번에는 ‘툭!’ 두 번째 총성이 울렸고, 결국 아베 전 총리는 앞으로 쓰러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요미우리신문 기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간 멍했다”면서 “정신을 차리고 연설대를 보니 전 총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목격에 의하면 “아베 전 총리는 힘없이 도로에 누워있었고 와이셔츠는 피로 흥건했다”고 한다.
“의사 없나요?” “누가 살려주세요” “자동심장충격기(AED) 없나요?” 다급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이후 의료진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아베 전 총리의 심장마사지를 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한 여대생(18)은 “용의자가 무차별적으로 발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도망쳤다”며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울먹였다.
야마가미 용의자는 현장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별다른 저항 기색은 없었으며 경찰에 체포됐다. 이와 관련, 경찰은 “용의자가 ‘내가 한 일이 틀림 없다’며 범행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고 밝혔다.
오전 11시 37분. 소방국 대원이 도착했고 “길을 비켜주세요”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구급차가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 뒤 아베 전 총리는 낮 12시 20분쯤 헬기로 나라현립의대부속병원에 긴급 후송돼 소생 치료를 받아왔으나, 피격 5시간 반 만에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하루 전 바꾼 일정이 운명까지 바꿨다
아베 전 총리는 재임기간이 8년 8개월로 일본 헌정 사상 가장 긴 기간 집권한 총리다. 퇴임 후에도 자민당 최대 파벌의 수장으로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연설 도중 피격을 당해 끝내 ‘비운의 총리’로 역사에 남게 됐다.
자민당의 한 간부는 “아베 전 총리가 이번 참의원 선거를 적극 응원해왔다”고 전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여전히 인기가 높아 지원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는 설명이다. 간부는 “당초 교토 시내에서 지원 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나라 선거구가 접전을 벌이면서 유세 일정을 급작스레 전날 밤 바꿨다. 그래서 더욱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고 비통해했다. 안타깝게도 하루 전 변경한 일정이 아베 전 총리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64)는 사망한 아베 전 총리에 대해 “위대한 정치인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그는 총격 사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민주주의 근간인 선거가 이뤄지는 가운데 일어난 비열한 만행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최대한 엄중한 말로 비난한다”고 규탄했다.
#이웃주민들 “용의자 매우 얌전했다”
아베 전 총리를 쏜 ‘총격범’은 어떤 인물일까. 방위성 관계자에 따르면 “야마가미 용의자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해상자위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아사히신문은 “야마가미가 자위대에서 연 1회 정도 소총을 다루는 기본 훈련을 받았으며 실탄 사격 및 소총 분해나 정비, 조립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오사카부의 인력 회사 관계자를 인용해 “야마가미가 2020년 가을부터 간사이 지방에 있는 제조업체에 근무했지만, 올해 4월 ‘힘들다’며 퇴직을 신청해 5월에 퇴직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용의자는 무직 상태다.
야마가미는 사건 현장에서 약 3km 떨어진 원룸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은 지 30년 된 8층짜리 건물로 다다미 6장(약 3평) 크기의 방이었다. 이웃 주민에 따르면 “월세는 3만 8000엔(약 37만 원)으로 독신자나 학생 거주자가 많았다”고 한다. 용의자와 같은 층에 사는 60대 남성은 “무섭다”며 목소리를 떨었다. 다만 “용의자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남성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일본 매체 ‘스포니치’에 의하면, 야마가미 어머니는 결혼해 미에현에서 야마가미와 3세 아래 여동생을 출산했다. 그러나 “남편이 일찍 죽자 고향인 나라현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야마가미의 어린 시절을 아는 주민들은 그의 인상에 대해 “상당히 어른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공격성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얌전했다”는 증언이다.
한 주민은 “소년이 있던 기억이 없다”며 “집밖으로 별로 나오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주민 역시 “야마가미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를 했지만, 야마가미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용의자 “특정 종교단체에 원한”
범행 동기는 9일 현재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경찰에 따르면 ‘특정 종교단체에 원한을 품은 것’이 계기가 돼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수사관계자는 “야마가미가 경찰조사에서 특정 종교단체에 원한을 품었고 아베 전 총리가 이 단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NHK는 “용의자가 경찰 조사에서 ‘아베 전 총리에게 불만이 있었고 죽이겠다’고 생각해 노렸다. 하지만 불만이 정치적 이유는 아니라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아사히신문은 “야마가미의 한 친척이 ‘특정 종교단체를 둘러싸고 그의 가정이 망가졌다. 야마가미는 그 단체로부터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야마가미는 직접 만든 총으로 아베 전 총리를 저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한 총은 검은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경찰은 “외형으로 보면 분명히 사제 총으로 길이 40cm, 높이 20cm였다”며 “용의자의 자택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사건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사제 총을 몇 정 압수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압수한 PC에는 인터넷 무기제조에 관한 사이트 열람 이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야마가미로부터는 “권총과 폭발물을 지금까지 여러 개 제조했다. 올해 봄부터 준비해 왔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수사관계자는 “야마가미가 아베 전 총리에 대해 강한 살의를 가지고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호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은 개인의 총기 소지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총기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비극은 충격이 더욱 크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 회의에서는 “총기 규제가 심한 나라인데 총격 사건이 일어나 놀랍다”라는 말이 나왔고,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총기 규제가 엄격한 나라에서 극히 드문 사건이 일어났다”며 온라인판에 크게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경호가 허술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번 연설 장소는 유세차량이 아닌, 역 앞 로터리 펜스 앞에 임시로 설치된 낮은 무대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 남성은 “경호원이 현장에 20~30명 정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베 전 총리의 앞 청중들을 향해 서 있었고 뒤쪽을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왜 용의자가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을 허락했는지를 묻고 싶다.” 무엇보다 경호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아베 전 총리를 수행하면서도 범인이 5m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난은 커지고 있다. 애초 360도를 커버하기 힘들기 때문에 적어도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등 경계 장소를 좁혔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1차 발포가 있고 난 후에도 적극적인 방어가 되지 않았다. “신속하게 대응했다면 2번째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경찰은 피습된 아베 전 총리에 대한 경호 체계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전쟁 가능한 나라’ 개헌 의석 확보 위해 유세 나섰다가…
아베 신조 전 총리는 1954년 일본에서 손꼽히는 정치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세습 정치인’이다. 외할아버지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외무상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다.
가문의 후광으로 아베 전 총리는 39세 되던 해인 1993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된다. 이후 연속 10선을 기록했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때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우익 정치인’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을 역임했으며, 2006년 9월 52세에 ‘전후 최연소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2007년 참의원 선거에 참패, 지병인 궤양성대장염마저 악화돼 불과 1년 만에 퇴진해야만 했다. 절치부심한 아베는 5년 만인 2012년 9월 다시 자민당 총재에 오른다. 같은 해 자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총리 자리에도 다시 올랐다. 이후 6번의 중의원 및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는 등 2020년 총리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아베 1강’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일본 내에서는 “재임 기간 중 정상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지통신은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다만 정권의 최대 중요 과제로 자리매김한 납치문제나 러시아와의 북방 영토 문제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강경 우익 노선으로 인해 주변국과는 마찰을 자주 빚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는 역대 최악이었다.
정권이 장기화되면서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 ‘벚꽃을 보는 모임 스캔들’ 등 각종 의혹이 터져 나왔고, 야당으로부터 ‘권력을 사유화한다’는 추궁도 받았다. 결정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기가 급락했다. 결국 2020년 9월 지병 재발병을 이유로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베 전 총리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드는 방안을 평생 과업으로 추진해왔다. 이번 참의원 선거는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의석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를 가르는 성격이 짙었다. 아베 전 총리가 선거 유세에 발 벗고 나선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 죽음을 맞았고, 결국 숙원을 이루지 못한 채 퇴장하게 됐다
아베 신조 전 총리 주요 이력
생년월일 1954년 9월 21일
출신지 야마구치현
선거구 야마구치 4구
당파 자민당
당선 횟수 중의원 10선
주요 경력
1972년 고베 제강소 근무
1982년 외무대신비서관
1993년 중의원의원 첫선
2003년 자민당 간사장
2005년 내각관방장관
2006년 90대 총리
2012년 96대 총리
2014년 97대 총리
2017년 98대 총리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