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구원의 문장이지만 현재에 거해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 문장은 언제나 깊이 감춰져있다. 과거로부터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두려움과 조바심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불안이 현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체가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조바심의 무게에 내 현재는 언제나 짓눌려 있고 그것이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이유일 수 있다.
내가 ‘나’에 이르지 못하는 한 사물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가졌더라도 지혜에 이르지 못함을 역설했던 몽테뉴의 ‘에세’가 엄청난 두께로 다시 나왔다. ‘에세’는 예전에 ‘수상록’이라고 번역되었던 그 책으로, ‘에세’는 ‘에세이’의 기원이 되는 불어다.
몽테뉴를 평생의 벗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불문학자 최권행 교수와 심민화 교수가 10년에 걸쳐 번역했다고 하니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맺어온 그 우정 속에서 그들이 느꼈을 행복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몽테뉴가 말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제대로 사는 일이라고. 다른 모든 일들, 다스리고 재물을 모으고 건물을 짓는 일은 기껏해야 부속품이라고. 그는 오늘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조바심을 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아니, 당신이 살지 않았단 말인가. 사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근본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빛나는 일이기도 하다.”
400년이 넘게 전해져온 ‘에세’는 몽테뉴가 누군가에게 던져주는 교훈이나 설교, 혹은 충고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대화이며 나아가 ‘나’에 대한 탐구다. 왜 이 ‘에세’가 우리(nous)에서 벗어나 정신적 개인(je)을 탄생시킨 책이라 평가되는지 알 것 같다.
그는 한 개인이 소란스런 생각에 치이고 망상을 만들어 번뇌에 빠지는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 때문에 번뇌에 빠진다.” 불행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오직 우리의 판단 때문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좋은 일로 만드는 것도 우리 능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왜 우리가 주인으로서 그것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조절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불행 또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로서 불행이나 고통이 아니고, 단지 우리 생각이 그 사물에 그런 성질을 부여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는 자기만의 방에서 개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감정을 거부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 감정의 바닥까지 오롯이 느끼며 대면하며 그리고 나서 한땀 한땀 문장을 써내려간 것 같다. 번뇌망상의 바닷가에서 허우적대보지 않거나 자기 생각의 그림자에 놀라 경박하게 행동해보지 않고 자기 행동과 판단에 묻어있는 독을 이해하고 해독할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춤을 출 땐 춤을 추고, 잠을 잘 때 잠을 자고, 홀로 있을 때는 홀로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 몽테뉴의 삶과 말은 찬찬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몽테뉴가 말한다. “이 에세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
현상학자 훗설의 철학에서 내가 좋아한 것은 바로 ‘판단중지’였다. 이 무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물에 쏟아 부은 마음들을 판단중지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해치고 있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정신의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판단을 중지하는 것!
몽테뉴는 바로 현대의 훗설이 했던 것을 450년 전에 이미 실천했던 것이다. 귀족이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그는 판단중지의 서재를 만들었다. 나를 정화해가는 나만의 방이었다. 38세에 법관을 은퇴하고 도대체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지식의 내용을 따라가지 않고 그 모든 것의 중심인 ‘나’를 탐구하는 그에게서 나도 묘한 우정을 느낀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