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국가나 도시 혹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을 뜻한다. 전쟁 등을 거치며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한 건물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각 지역마다 랜드마크 반열에 올라서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당시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우던 기업들과 연관이 깊다. 이 때문에 해당 랜드마크의 역사는 기업 또는 산업의 역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물은 시장과 산업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일요신문이 각 지역 랜드마크와 기업이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일요신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일대는 서울시의 역사가 함축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다. 최근 들어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다고 하지만 정부서울청사, 통일부, 외교부, 금융위원회 등 주요 기관은 여전히 광화문 인근을 지키고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를 뜻하는 '광화문 네거리'는 흔히 서울의 중심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됐다. 광화문 네거리의 터줏대감 격인 건물이 바로 교보생명빌딩이다. 주변 건물에 비해 유난히 높고 웅장하며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도 바로 앞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다. 특히 교보생명빌딩 지하1층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형서점 교보문고가 있어 여느 기업 사옥과 달리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특징이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명예회장은 1937년 중국으로 건너가 쌀 도매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울로 돌아온 신 명예회장은 출판업, 제철업 등의 사업을 펼쳤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1958년 대한교육보험을 설립해 보험업 도전에 나섰다. 그는 당시 생소했던 교육보험을 선보이면서 인기를 끄는 데 성공했다. 대한교육보험은 교육보험 외에도 아동보험, 퇴직보험, 군인보험 등 보험업계 틈새시장을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국내 대표 보험사로 발돋움했다. 대한교육보험은 1995년 사명을 현재의 교보생명보험으로 변경했다.
교보생명의 첫 사옥은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에 위치한 2층 건물이었다. 1965년 사세가 커지자 회현동 세대빌딩으로 본사를 옮겼다. 세대빌딩은 1965년 세대건설합자회사가 세운 건물로 당시로서는 고층인 13층 규모였다. 교보생명은 1~2층, 6~13층을 사용했고, 나머지 층은 제일화재보험, 주한필리핀대사관 등이 입주했다. 세대빌딩은 수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도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용호 명예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옥 건축을 모색했다. 그는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25년 내에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고, 가장 좋은 땅에 좋은 사옥을 짓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미 교보생명은 현 교보생명빌딩 부지를 수년에 걸쳐 매입해왔다. 해당 부지는 1972년 철거된 전매청(KT&G의 전신)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교보생명이 해당 부지를 매입하자 정부에서는 관광호텔을 지을 것을 제의했고, 신용호 명예회장도 이를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사옥 건설을 선택했고, 1977년 착공에 들어갔다. 교보생명빌딩의 공식 준공연도는 1984년이지만 실질적 완공 시기는 1980년이다. 교보생명도 1980년 가사용 허가를 받고 교보생명빌딩을 사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보생명빌딩을 설립하면서 정부의 직간접적인 압박도 있었다. 신용호 명예회장이 당초 구상한 교보생명빌딩 높이는 23층이었지만 당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교보생명빌딩 높이를 17층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다. 청와대 인근에 너무 높은 건물이 있으면 부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미 교보생명빌딩 건설은 막바지를 향하고 있어 차지철 실장의 요구를 수락하려면 대대적인 설계 변경이 필요했다. 신 명예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등 노력 끝에 무사히 교보생명빌딩을 완공할 수 있었다.
처음 교보생명빌딩이 완공될 때는 지하 1층에 상가가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평소 책에 관심이 많았던 신용호 명예회장은 대형 서점 설립을 추진했다. 영세 서점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교보생명 내부에서도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신 명예회장은 인근 서점들을 설득하고, 내부적으로는 전담팀을 구성하는 등 정면돌파로 대응했다. 그렇게 1980년 교보문고 법인이 설립됐고, 1981년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교보문고는 한동안 대형서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교보문고를 찾는 이들이 많았고 '교보'라는 브랜드를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교보생명빌딩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이다. 교보생명과 교보문고가 ‘종로 1번지’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덕에 많은 사람들이 종로구의 랜드마크로 교보생명빌딩을 꼽는다.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있는 ‘광화문글판’도 매력적인 요소다. 광화문글판에 새겨진 문구는 매 계절마다 바뀌며 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교보생명빌딩은 대외적으로 23층으로 알려졌지만 건축물 대장에는 24층으로 기재돼 있다. 교보생명에 따르면 옥상에 있는 물탱크실 구조물이 층수로 잡힌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23층까지만 업무 공간 등으로 사용된다.
교보생명빌딩은 교보생명그룹과 종로구의 상징으로 꼽히지만 논란거리도 있다. 신용호 명예회장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주일미국대사관을 교보생명빌딩의 모티브로 삼았다. 실제로도 주일미국대사관을 설계한 아르헨티나 출신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교보생명빌딩 설계를 의뢰했다. 하지만 반일 감정으로 인해 교보생명빌딩을 향한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동아일보와 건축 잡지 ‘SPACE’가 2013년 실시한 ‘광복 이후 지어진 현대건축물 중 최고의 건물과 최악의 건물’ 설문조사에서 교보생명빌딩이 최악의 건물 1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교보생명빌딩은 훗날 국제 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신용호 명예회장은 대우그룹에 교보생명빌딩 시공을 맡겼고, 시공비를 저렴하게 측정한 대신 교보생명 지분 35%를 대우그룹에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그룹이 IMF 외환위기로 공중분해된 후에도 대우인터내셔널이 교보생명 지분 24%를 보유하고 있었고, 해당 지분은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어피니티) 컨소시엄이 2012년 매입했다. 당시 경영권 위협을 받던 신용호 명예회장의 장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어피니티가 매입한 지분의 의결권을 갖는 대신 2015년 9월까지 교보생명의 기업공개(IPO·상장)를 시행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IPO를 하지 못하면 해당 지분 24%를 신창재 회장이 되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교보생명 IPO는 이뤄지지 않았고, 신창재 회장이 어피니티의 교보생명 지분을 매입하지도 않았다. 교보생명은 최근에도 IPO를 추진했지만 한국거래소의 예비상장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어피니티 측은 “교보생명이 상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주주 개인의 분쟁에서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무리하게 IPO를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교보생명은 “IPO가 본궤도에 오를 때마다 어피니티는 상장을 가로막았다”며 “지난해 9월 신창재 회장이 국제중재위원회(ICC) 중재판정부로부터 ‘주식을 사 줄 의무가 없다’는 승소 결과를 받고 IPO 재추진에 나서자 (어피니티가) 가처분과 가압류 소송 등을 제기해 발목을 잡았다”고 반박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