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위 선동열-최동원 역대 최고 라이벌…‘바람의 아들’ 이종범-‘라이언킹’ 이승엽 3·4위 차지
KBO는 올해 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프로야구 '레전드 40인'을 선정했다. 선정위원회가 추천한 후보 177명(현역 선수 제외)을 대상으로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합산해 최종 40명을 추렸다. 이어 7월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2 KBO 올스타전에 앞서 40인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4명을 먼저 공개했다.
그 결과 선동열은 전문가 투표 156표 중 155표(79.49점), 팬 투표 109만 2432표 중 63만 1489표(11.56점)를 각각 받아 총점 91.05로 1위에 올랐다. 고(故) 최동원이 총점 89.99로 그 뒤를 이었다. 최동원은 유일하게 전문가 투표에서 156명 전원의 선택을 받았고, 팬 투표에서도 54만 5431표(9.99점)를 확보했다.
3위 이종범과 4위 이승엽은 0.76점의 근소한 차이로 순위가 갈렸다. 이종범은 전문가 투표에서 149표(76.41점), 팬 투표에서 59만 5140표(10.90점)의 지지를 받아 총점 87.31을 획득했다. 이승엽은 전문가 투표에서 이종범과 같은 득표를 했지만, 팬 투표에서 55만 3741표(10.14점)를 얻었다.
#'국보 투수' 선동열
선동열은 명실상부한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힌다. "불펜에 선동열이 등장해 몸을 풀기만 해도 상대 팀은 전의를 잃었다"는 전설적 비화의 주인공이다. 해태(현 KIA) 타이거즈 사령탑이었던 김응용 감독은 이 점을 이용해, 등판 계획이 없는 선동열을 불펜에 내보낸 뒤 몸을 푸는 척하게 시킨 적도 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선동열의 당시 성적을 보면 그런 분위기에 납득이 간다. 그는 1985년 해태에 입단한 뒤 1995년까지 통산 367경기에서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하며 '해태 왕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통산 이닝당 출루허용(WHIP)은 0.80. KBO리그에서 1000이닝 투구한 투수 중 단연 1위다.
11시즌 중 5차례(1986·1987·1992·1993·1995)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2.00을 넘긴 시즌은 1994년(2.73)밖에 없다. 여덟 번이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가져갔는데, 그중엔 7년 연속(1985~1991) 수상이 포함돼 있다. 특히 1993년 기록한 0.78은 29년째 역대 한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 1986년에는 한 시즌 262과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탈삼진 214개, 완봉승 8회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선동열은 1995년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33세이브(평균자책점 0.49)를 올린 뒤 임대 선수로 일본 프로야구(주니치 드래곤스)에 진출했다. 이후 일본에서도 '나고야(주니치의 연고지)의 태양'이라는 별명과 함께 세 시즌 동안 리그 정상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리다 한국에 복귀하지 않고 1999년 은퇴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격언을 실제 삶에서 실행에 옮긴, 보기 드문 스포츠스타였다. KIA는 타이거즈의 역사를 빛낸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투혼의 무쇠팔' 최동원
최동원은 마운드에 불꽃 같은 이야기를 남긴 투수였다. 금테 안경 뒤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면서 지칠 줄 모르고 공을 던졌다. 특히 1984년은 그 스토리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그해 51경기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 '무쇠팔'이었다. 그해 최동원이 잡은 삼진 223개는 지난해 두산 외국인 투수 아리엘 미란다가 경신하기 전까지, 36년간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자리를 지켰다. 별명에 걸맞게 KBO리그 통산 평균자책점 2위, 최다 완투(81회) 2위에도 올라 있다.
무엇보다 최동원은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1패)을 따내는 불멸의 역사를 남겼다. 1·3·5차전을 완투(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8이닝 완투패)했고, 6차전에서 구원승을 올린 데 이어 7차전에 다시 선발 투수로 나가 완투승을 해냈다. 한국시리즈 7경기 가운데 5경기에 등판해 총 40이닝을 던졌는데도 평균자책점은 1.80이었다.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믿기 힘든 활약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첫 우승은 최동원으로 시작해 최동원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타율 0.143(21타수 3안타) 1홈런 3타점 2도루를 기록한 유두열에게 한국시리즈 MVP를 양보했다. 최동원이 이미 정규시즌 MVP를 사실상 확보한 뒤라 "한 선수에게 최고의 상 두 개가 몰리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에 가로 막혔다는 후문이다.
최동원은 1985년에도 20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1.92을 기록했고 1986년엔 19승 2세이브, 평균자책점 1.55을 올렸다. 그렇게 프로에서의 첫 5년간 1209과 3분의 1이닝(연 평균 241.6이닝)을 책임졌다. 그 여파로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전성기가 길지 않았지만,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투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그는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2011년 세상을 떠났고, 롯데는 그의 등 번호 11번을 뒤늦게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퍼펙트 라이벌
'레전드 40인'의 원투펀치 선동열과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나이로는 5년 터울이고 프로 경력으로는 4년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은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한 최고의 투수들이면서 영남(최동원)과 호남(선동열), 연세대(최동원)와 고려대(선동열), 롯데(최동원)와 해태(선동열)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까지 펼쳤다.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생의 맞수였다.
승자를 가릴 수도 없다. 현역 시절 세 번의 맞대결을 펼쳐 1승 1무 1패.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 앞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세 경기 모두 두 투수가 최고의 피칭을 펼치며 완투했다. 기승전결까지 완벽한 라이벌전 스토리 덕에 '퍼펙트 게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둘의 첫 맞대결은 1986년 4월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다. 결과는 해태의 1-0 승리. 선동열은 프로 데뷔 첫 완봉승을 따냈고, 최동원은 3회 솔로홈런 하나를 허용해 통한의 완투패를 당했다. 4개월 후 사직구장에서 두 번째 맞대결이 열렸을 땐 결과가 반대였다. 최동원이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을 따냈다. 선동열은 2실점으로 완투패했는데, 2점이 모두 수비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이었다.
세 번째 맞대결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밑줄을 치고 기억해야 할 경기 가운데 하나였다. 1987년 5월 16일, 다시 사직구장. 당시 스물아홉으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던 최동원과 스물넷으로 패기와 힘이 넘쳤던 선동열은 둘 다 연장 15회로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았다. 두 투수의 투구수 합계가 무려 441개. 선동열이 232개, 최동원이 209개의 공을 각각 던졌다. 요즘 웬만한 선발 투수들의 2경기 투구수를 합쳐도 넘기 어려울 경지다.
경기는 끝내 4시간 56분 만에 2-2 무승부로 끝났고, 최동원과 선동열의 전설적인 명승부도 그렇게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 경기 현장을 지켰던 한대화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둘 다 15회까지 버티는데도 경기 막판까지 볼이 어마어마했고, 양 팀 분위기도 계속 팽팽했다. 다시는 그런 명승부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종범과 이승엽
백전노장 김응용 감독이 "야구는 이종범"이라고 인정한 선수. 젊은 야구팬에게는 '이정후(키움 히어로즈) 아버지'로 더 유명할지 몰라도, 이종범은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놀라운 야구 센스를 뽐내며 그라운드를 누빈 천재 유격수였다. 1993년 데뷔한 뒤 1990년대에만 네 차례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따내면서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연장한 일등공신이다. 특히 데뷔 2년 차인 1994년에는 타율 0.393, 196안타, 113득점, 도루 84개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남겨 단숨에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한 시즌 도루 84개는 앞으로 아무도 깨지 못할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모든 기록을 넘어서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 이정후조차 "84도루 기록만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또 타율 0.393은 프로야구 원년의 백인천(0.412) 이후 여전히 가장 높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승엽은 한국 야구가 낳은 역대 최고 타자로 꼽힌다. 1997년 삼성에서 데뷔한 뒤 최연소 100홈런, 최연소·최소경기 200홈런, 7시즌 연속 30홈런 등 숱한 KBO리그 홈런의 역사를 쉴 새 없이 다시 써왔다. 특히 2003년 홈런 56개를 날려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을 세웠고, 통산 최다 홈런(464개) 기록을 남기고 2017년 은퇴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처음으로 '통산 400홈런'이라는 기록을 새긴 주인공이다. 8년(2004~2011년) 동안 일본에서 뛰었는데도 이승엽을 따라잡을 홈런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골든글러브 10회 수상, 정규시즌 MVP 5회 수상 역시 역대 최다 기록이다. 국제대회, 특히 일본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이나 적시타를 때려내던 '국가대표 4번타자' 이승엽의 존재감도 독보적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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