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리더십’으로 선수들의 숨겨진 가능성을 끌어낸 류중일 감독.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올해 삼성을 세 번이나 정상에 올려놓았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언뜻 초보 감독 류중일(48)이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아시아시리즈를 모두 제패한 게 전적으로 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야구인은 “운도 실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며 “류 감독이 그만큼 준비된 사령탑이기에 운도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고 시절 최고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이래 류 감독은 언제나 운이 따랐다. 하지만, 그 이면엔 숨겨진 불안도 있다.
“명장? 글쎄, 난 복장이 아닐까. 다 선수들이 잘해서 우승한 거지.” 삼성이 SK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때다. 류중일 감독은 우승 배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연방 웃으며 선수들 앞으로 공을 돌렸다.
하지만, 류중일이야말로 삼성 우승의 가장 큰 공로자였다. 이유가 있다. 그의 ‘믿음의 리더십’이 선수들의 숨겨진 가능성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 선수들은 “류 감독님 부임 이후 팀 분위기가 무척 좋아졌다”며 “선동열 감독님 시절의 팽팽한 긴장감은 유지하되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가 한국시리즈에서 큰 효과를 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12월 31일 선 감독 후임으로 류중일이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을 때 야구계는 ‘놀랐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류중일의 보직은 수비코치였다. 수석코치나 타격, 투수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되는 경우는 있어도 수비코치가 감독이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류중일은 선 감독 시절 ‘조용한 코치’로 불렸다.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대권에 대한 욕망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몸을 낮춘 채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일만 충실히 했다. 그런 류중일을 선 감독은 퇴임하며 신임 감독으로 추천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류 코치는 현역부터 지금까지 오직 삼성에만 있었다. 팀 사정과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팀에 있던 지도자가 오면 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류 코치라면 빠르게 팀을 안정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선 감독의 말이다.
덧붙여 선 감독은 “대구가 자랑하는 스타 출신 지도자여서 연고지 팬 모두가 납득하리라 믿었다”고 말했다.
▲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를 재패하던 순간.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류중일은 1963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야구는 포항중앙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했다. 그러나 팀이 해체되며 5학년 때부터 대구초등학교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불행은 계속됐다. 이번엔 대구초등학교 야구팀이 해체했다. 삼덕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간 류중일은 어렵게 야구를 배웠다.
초등학교 시절의 그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또래보다 어깨가 강했던 까닭이다. 대구중으로 진학하며 류중일은 유격수를 보기 시작했다. 역시 어깨가 강했기 때문이다. 중학 시절부터 뛰어난 수비와 빠른 발로 대구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건 경북고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당시 경북고는 성준, 문병권, 김성래 등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에 류중일이 입학하며 팀 전력이 탄탄해졌다. 1981년 류중일이 2학년일 때 경북고는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에서 차례로 우승하며 전국 최강으로 우뚝 섰다.
류중일의 존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류중일은 고교생 유격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포구와 정확한 송구로 ‘장래 김재박을 뛰어넘을 국가대표 유격수’로 꼽혔다.
류중일도 그러한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슴 깊이 김재박을 존경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류중일이 전국구 고교 스타에 오른 것도 김재박의 영향 때문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류중일은 ‘경북고의 류중일’이었다. 일부 야구전문가는 “경북고가 원체 강하다보니 류중일까지 덩달아 좋은 평가를 받는 것뿐”이라며 평가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2년 7월 16일 류중일이 잠실구장 개장 1호 홈런을 때리자 상황은 바뀌었다. 경북고와 류중일을 분리해 평가하는 이들이 늘었다.
1983년 한양대로 진학한 류중일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대표팀에 뽑혔다. 주전 유격수 자리도 그의 차지였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시범종목에 야구가 채택됐을 때도 태극마크를 달았다. 1985년 대륙간컵과 1986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선 출중한 수비력으로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류중일에게 운명의 선택이 찾아온 건 1987년이었다. 당시 류중일은 대한야구협회로부터 “다음해 열리는 서울올림픽까지 아마추어 선수로 남아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한양대 졸업을 눈앞에 둔 시점이라, 류중일은 장고를 거듭했다.
LA올림픽에서 못다 이룬 메달의 꿈을 서울올림픽에서 이루고 싶었지만, 연고지팀 삼성 역시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류중일은 고민 끝에 실업야구 제일은행에 입단해 서울올림픽에 뛰기로 마음먹었다. 대한야구협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포스트 오대석’이 필요했던 삼성은 류중일의 부모를 설득했다. 결국, 류중일은 아마 잔류를 번복하고, 그해 1월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중앙일간지들은 앞 다퉈 류중일의 삼성 입단을 보도하며 그를 ‘차세대 김재박’이라고 불렀다.
▲ 아시아시리즈(오른쪽)를 제패하던 순간.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삼성이 류중일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주전 유격수로 오대석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는 타격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대석은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 구단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87년 류중일은 입단하자마자 오대석을 밀어내고 주전 유격수를 꿰찼다. 11연타수 안타를 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형 신인 유격수의 등장에 야구계는 열광했다. 그해 류중일은 104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8푼7리, 2홈런, 28타점을 치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신인왕은 타율 3할3푼5리, 4홈런, 34타점, 20도루로 돌풍을 일으킨 빙그레 이정훈의 차지였다.
삼성은 “11연타수 안타라는 대기록을 인정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빙그레의 “이정훈의 22경기 연속 안타를 뭘로 보느냐”는 반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류중일에 운이 따르지 않은 건 아니다. 그해 류중일은 김재박을 제치고 골든글러브 유격수에 선정됐다. 자신의 우상을 프로 데뷔하자마자 극복한 셈이었다. 김재박의 동료였던 모 야구인은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류중일이 호명되자 김재박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며 “지금도 서둘러 식장을 떠나던 김재박을 잊을 수 없다”고 귀띔했다.
류중일은 2년 차 징크스와 무관했다. 1988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삼성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팔꿈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해 류중일은 47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0년 부상에서 회복한 류중일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타율 3할1푼1리, 6홈런, 45타점, 23도루를 기록했다. 언론은 “이제야 진정한 류중일의 시대가 열렸다”며 흥분했다. 그해 골든글러브 유격수 수상자는 단연 류중일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해 방위병으로 입대한 것이다.
당시는 방위병이라도 홈경기는 뛸 수 있었기에 선수생활을 잇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현역선수와 방위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게 힘들고, 컨디션도 꾸준히 유지하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소집해제된 1992년 류중일은 104경기에 출전하고도 타율 2할1푼1리를 기록하며 참담한 성적을 냈다. 지금도 류중일이 “한참 분위기를 탈 무렵 입대하는 통에 절정의 컨디션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타율 2할8푼1리로 극적으로 부활했지만, 이때 유격수 계보는 김재박-류중일에서 해태 이종범으로 넘어간 후였다. 이종범은 6년 전 류중일이 그랬듯이 신인 골든글러버가 됐다. 김재박을 능가하는 광범위한 수비 범위와 류중일의 어깨를 넘어서는 강견으로 이종범은 명실 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유격수가 돼 있었다.
류중일은 1994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향세를 탔다. 이번엔 목부상이 원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출전경기는 급감했고, 타율도 2할 초반대에 그쳤다. 리그를 대표하던 그의 수비도 ‘평범하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던 류중일은 1999년 백업 유격수로 전락하자 은퇴를 발표했다. 그런 류중일을 삼성은 성대한 은퇴식으로 격려했다. 삼성 선수로는 첫 은퇴식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이전까지 삼성은 레전드들의 은퇴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등 삼성을 빛낸 선수들은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조용히 사라지거나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돼 초라하게 은퇴하는 게 관례 아닌 관례였다.
삼성 김재하 전 단장은 “구단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식 없이 사라져가 매우 아쉬웠다”며 “성실히 선수생활을 한 류중일만은 그냥 보내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회상했다.
현역생활을 정리한 류중일은 곧바로 삼성 코치가 됐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 즈음엔 국외 연수를 다녀오고서 코치가 되거나 원정기록원 등으로 1, 2년 정도 구단 직원으로 근무한 뒤 코치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삼성 레전드 가운데 한 이는 “좋게 말하면 묵묵히 선수생활을 한 류중일의 성실성을 구단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며 “조금 꼬아서 이야기하면 류중일이 그만큼 구단에 고분고분했던 선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수비의 달인
코치 류중일은 선수 류중일보다 저평가된 점이 있다. 류중일은 수비코치로 일하며 이른바 ‘다저스 수비’를 체계화한 이였다. 1985년 삼성은 국내 구단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LA 다저스가 운영하는 플로리다주 베로비치 캠프였다. 그곳에서 삼성은 수년간 다저스 코치들로부터 선진적인 수비를 배웠고, 류중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류중일은 코치가 된 이후 ‘다저스 수비’를 국내야구에 맞게 발전시켰다. 2000년 이후 삼성 수비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도 류중일의 노력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류중일은 선수들과 소통할 줄 아는 코치였다. 선수들은 선배에게 다가가듯 류중일을 찾아 인생 상담을 했고, 류중일은 그라운드에서처럼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엄격한 지도와 권위로 무장한 김응용, 선동열 감독 시절 선수들이 “우리에겐 류 코치님이 산소마스크”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치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2008년 11월 류중일은 2군 코치로 발령났다. 선수로 뛴 13년 동안에도 부상이 아니고서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그였다. 코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8년 동안 붙박이 1군 코치로 활약했다. 당시 삼성 주변에선 “류 코치가 본업인 야구단 이외 다른 부업에 신경을 많이 쓰다가 선 감독 눈밖에 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 코치들의 시선도 싸늘했던 게 사실이다.
감독이 되리라 믿었던 2군행은 되레 약이 됐다. 모 코치는 “류 코치가 10개월 동안 2군에 있으면서 더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며 “본인도 많은 걸 느낀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삼성 감독이 된 배경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에 4연패한 삼성은 훗날을 기약했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서 선 감독은 “우리의 목표는 2012년 우승”이라며 “우승하지 못했어도 크게 아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그룹의 생각은 달랐다. 삼성의 최고 경영자는 “모그룹에서 그토록 많은 운영비를 대주는데 1등이 아니어도 좋다는 게 무슨 소리냐”며 역정을 냈다.
결국, 선 감독은 4년 임기를 남긴 채 쓸쓸히 퇴장했다. 문제는 대안이었다. 모그룹으로부터 선 감독 경질을 통보받은 삼성 구단 수뇌부는 갑작스럽게 신임 감독을 물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우리도 선 감독의 경질을 통보받고 깜짝 놀랐다. 경질 소식이 알려졌을 때 전체 야구계가 받을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언론과 팬들로부터 쏟아질 비난도 고려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충격파를 줄이려면 신임 감독을 빨리 발표해야 했다. 그러나 후보가 마땅하지 않았다. 결국, 대구와 삼성 출신의 야구인 가운데 후보자를 찾았고, 외부 영입 감독은 팀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판단해 삼성 코치 중에서 뽑기로 했다. 선 감독의 추천도 있고, 팀에 가장 오래 있었던 류 코치를 서둘러 결정했다. 그 바람에 솔직히 2011시즌 성적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류중일은 감독 취임사에서 “우승이 목표”라고 발표했고, 그 약속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류중일에게 남은 숙제는 하나다. 일부 야구전문가는 올 시즌 삼성의 약진을 “선 감독이 밥상을 잘 차렸고, 류 감독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그 평가를 불식시키려면 내년 시즌이 중요하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했던 류중일의 야구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