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현실이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자연이 빚어내는 의외의 풍경이 그런 경우다. 일정한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풍경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소나기가 지나간 늦여름 저녁 하늘에 피어오른 핏빛 뭉게구름, 정월 대보름 언저리 도심 빌딩 사이로 느닷없이 떠오른 달, 비를 흠뻑 머금은 시커먼 구름을 배경으로 석양빛 받아 밝게 빛나는 마을 풍경, 무심코 바라본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달.
이런 풍경들은 평소에도 심심치 않게 연출되지만 초현실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때면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신선함도 이런 것이 아닐까. 지극히 평범한 소재를 새롭게 보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명작의 조건 중 하나다. 미술사에서 만나는 수많은 명작들은 이렇듯 익숙한 현실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낸다.
전영기 작가가 찾아가는 세계도 주변의 익숙한 상황에 숨어 있는 새로운 모습이다. 보이는 것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면 진부한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일상을 조금 관심 있게 관찰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전영기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바위나 식물의 한 부분을 근접 촬영한 모노톤의 사진처럼 보인다. 작은 세포들이 활동하는 인체의 한 부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도 하다. 분명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장면인데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작가가 의도하는 것도 이런 느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적 공간을 찾아낼 수 있다면 순간순간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매 순간이 소중한 현장이며 거기에 놓인 우리의 삶 자체도 엄숙하며 진중하다는 자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전영기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주변 풍경을 관찰해 조합하고 이를 볼펜으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작가가 볼펜을 고집하는 이유는 재료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일 뿐이다. 이런 평범함과 단순함을 품은 일상 속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