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오리미한복 |
뒤꽂이는 여성들이 쪽 찐 머리를 장식하려고 꽂은 장식이다. 조선 후기 가체(加髢: 부녀자가 잘 차려 입을 때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덧 드리는 다른 머리다발) 금지령으로 반가 부인의 얹은머리가 금지되고 쪽머리가 일반화하면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났다.
뒤꽂이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강조한 조선시대 복식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댕기와 함께 뒷모습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뒤꽂이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 무령왕릉(백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도 금제 뒤꽂이가 포함되어 있다. 이 뒤꽂이는 무령왕릉 목관 속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다.
▲ 뒤꽂이는 댕기와 함께 뒷모습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사진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문채원이 뒤꽂이를 착용한 모습. 사진제공=KBS |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맞아 국립공주박물관이 2012년 1월 29일까지 여는 기념특별전 ‘무령왕릉을 격물(格物)하다’에서도 금제 뒤꽂이를 만날 수 있다.
뒤꽂이는 조선 후기 명성황후 민비의 세필화(細筆畵)에서도 등장한다. 1895년 7월 15일자 <뉴욕헤럴드>는 명성황후 민비의 그림을 크게 싣고 있다. 세로 14㎝, 가로 12㎝ 크기의 초상이다. 여기에 나타난 귀고리와 머리장식 노리개 등은 당시의 복식과 장신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뒤꽂이는 쪽머리가 일반화된 19세기 중엽 이후에 한층 다양하게 서민사회에까지 보급되었다.
뒤꽂이의 재료는 비녀와 거의 같다. 금제도 있지만 대개는 은에 칠보(七寶)를 놓거나 산호 비취 밀화(蜜花: 밀랍 같은 누런 빛이 나고 젖송이 같은 무늬가 있는 호박(琥珀)) 같은 값진 보석들을 물려서 장식했다. 따라서 담담하고 소박한 의상 색채 속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계절에 따라 시원한 느낌의 비취나 백옥은 여름에, 따뜻한 느낌의 금이나 산호 등은 겨울에, 그리고 은 뒤꽂이는 사시사철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뒤꽂이는 궁가(宮家)·반가(班家)·일반의 신분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 일반에서 사용한 뒤꽂이는 과판이라 하여 국화 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연봉이라 하여 막 피어오르는 연꽃 봉오리를 본떠 만든 장식이 달린 것을 썼다. 매화·화접·나비·천도(天桃)·봉(鳳) 등의 모양으로 만든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연꽂은 불교의 영원불멸의 세계를, 대나무·국화·매화 등은 유교의 절개를 상징한다. 나비·새·벌 등은 부부간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을 희구하는 여인의 마음을 나타낸다.
▲ 무령왕릉 출토 금제 뒤꽂이 |
실용을 겸한 뒤꽂이로는 빗치개와 귀이개가 있다.
빗치개는 가르마를 탈 때나 밀기름을 바르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썼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머리 장식물로 사용했다.
귀이개는 원래 귀지를 파내는 기구인데, 이것도 장식물로서 쪽 찐 머리에 꽂게 되었다. 귀이개 구실만 하는 하나짜리가 있고, 귀이개와 함께 꽂이가 가지처럼 달린 것이 있다.
머리를 장식하는 헤어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귀이개나 머리를 정리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머리 장식으로 만들어서 사용한 예를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뒤꽂이에 스며든 조상들의 멋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뒤꽂이의 화려함과 아름다움도 어떤 헤어핀에 뒤지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한국의 미를 21세기에 재탄생시키기에 뒤꽂이만큼 적합한 장식품이 어디에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