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마사코 왕세자비와 그녀의 딸 아이코 공주가 우산을 쓰고 나가노역에 서 있다. 작은 사진은 일왕의 차남 후미히토 왕자와 그의 아들 히사히토 왕자가 책을 읽는 모습. AP=연합뉴스 |
일본의 총리자문기구는 2005년 고이즈미 정권 시절, 이미 여자도 왕을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당시 일본인의 80%가 여왕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와 이제 왕실에서도 남녀평등 시대가 올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초대 여왕 논의는 2001년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면서 시작됐다. 마사코비는 한 차례 유산을 한 뒤 결혼 8년 만에 어렵게 딸을 낳았다. 유능하고 활달한 그녀가 아들을 낳으라는 왕실 안팎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해 2003년부터는 심각한 우울증까지 생겼다. 이 때문에 마사코비가 동정표를 얻어 초대 여왕 논의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2006년 말 상황이 돌변했다. 시동생 후미히토의 부인, 즉 마사코비의 동서 기코비가 아들 히사히토를 낳았기 때문이다. 기코비는 왕실에 들어온 후 딸만 둘을 낳고 39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갖게 됐다. 관습대로 왕위 계승 순위를 따져보면, 히사히토 왕자가 현 왕세자와 아버지인 후미히토의 다음인 3순위다. 아이코 공주를 제친 것이다.
아들이 태어난 후 차남 후미히토 일가는 외부에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면서 대중적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어린 히사히토 왕자는 귀염성 있는 외모에 밝은 성격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이와 반대로 아이코 공주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천성으로 어렸을 적에 심지어 자폐증이나 다운증후군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은 바 있다.
히사히토 왕자가 차차기 왕으로 거론될수록 엄마인 기코비도 차츰 부각되고 있다. 그간 기코비는 외모도 학력도 경력도 죄다 마사코비에 뒤져 소위 ‘현모양처’ 정도로만 인식되어온 편이다. 하지만 이제 미래의 ‘왕의 모친’으로 위엄 있게 비춰지고 있다. 또 기코비의 두 딸 마코, 가코 공주는 얼짱으로 알려지며 등하교 및 입학식과 졸업식 등의 장면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있다. 특히 가코 공주는 2010년에 학교 친구들과 걸그룹 ‘소녀시대’ 춤을 따라하면서, 우익으로부터 ‘공주가 한류를 좋아하면 어쩌냐’는 불평까지 들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왕위 계승의 대세는 거의 히사히토 왕자로 굳어갈 태세다. 올 12월 초 여론조사에서는 일본인의 딱 절반만 여왕을 찬성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11월 중순경부터 한 유명 탤런트는 왕세자가 왕위를 아예 동생 후미히토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요지의 청원을 내고 서명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한 마사코비를 폐위해야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도 포함됐다.
그는 “마사코비가 정신질환으로 벌써 8년째 공식 활동이 거의 없으니 앞으로 왕비가 되더라도 왕세자와 나란히 대외적인 활동을 펼칠 수 없을 게 확실하다”며 “나아가 내조가 없으니 왕세자도 왕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마사코비의 올해 공식 활동도 올 3월 일본의 대지진 후 피해지역을 순방한 단 한 차례에 그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사코비가 우울증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혼이란 형태로 왕실을 제 발로 나가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견조차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폐위나 이혼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와의 금슬도 좋을뿐더러 마사코비는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장을 맡고 있는 오와다 히사시를 부친으로 둬 집안도 탄탄하기 때문이다. 또 우울증을 앓기 전에는 마사코비 본인도 외교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왕세자비로서의 공무를 수행하며 좋은 인상을 심어준 덕에 여태껏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2010년 왕따를 당해 등교거부를 일삼던 딸 아이코 공주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도 주부들 사이에서는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코비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이코 공주의 여왕 등극을 견제하려는 왕실 일가 내부와의 마찰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간신조>에 따르면 요즘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는 궁내청 직원들에게 마사코비가 왕실 행사시 어차피 나오지 않을 테니 초대 리스트에서 아예 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런 지시가 내려오면, 아이코 공주를 열심히 양육하며 우울증이 상당히 호전된 것으로 알려진 마사코비가 정작 나오려 할 때도 여간해서는 참석하기가 힘들다.
일설에 따르면 미치코 왕비는 워낙 부지런한 스타일로 마사코비를 ‘일하지 않는 게으른 며느리’쯤으로 여기고 있다. 또 일왕 부부는 손자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례적으로 병원을 직접 방문하고, 몇 년 전에도 손자하고만 휴가를 가는 등 유독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왔단 평이다.
시동생 부부와의 갈등은 좀 더 심각하다. 시동생 후미히토 왕자는 “대외활동은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라며 마사코비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동서 기코비는 아이코 공주의 왕따 문제에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고 있다. <주간문춘>에 의하면 아이코 공주는 학우들에게 “너희 엄마는 꾀병을 부리면서 세금을 축내고 있는 도둑”이라는 폭언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부모와 기코비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마사코비와 왕세자는 아직껏 왕위계승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코멘트는 내놓지 않고 있다. 한편 일부 일본 네티즌들은 ‘왕실의 근친혼 전통에 따라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왕자가 결혼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며 왕위 계승으로 야단법석인 왕실을 조롱하고 있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