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국가나 도시 혹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을 뜻한다. 전쟁 등을 거치며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한 건물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각 지역마다 랜드마크 반열에 올라서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당시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우던 기업들과 연관이 깊다. 이 때문에 해당 랜드마크의 역사는 기업 또는 산업의 역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물은 시장과 산업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일요신문이 각 지역 랜드마크와 기업이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일요신문] 여의도는 조선시대까지 큰 존재감이 없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공항이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공항으로서의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여의도공항의 민간 기능은 1958년 김포국제공항으로, 공군기지 기능은 1971년 서울공항으로 각각 이관됐다. 서울시는 여의도공항 폐쇄 후 대대적인 여의도 개발에 착수했다. 국회의사당, 한국증권거래소, 한국방송공사(KBS) 등이 여의도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부터다.
그중에서도 63빌딩(현 63스퀘어)은 여의도를 대표하는 건물로 한때 국내 최고 높이를 자랑한 건물이었다. 1980년 신동아그룹 계열사였던 대한생명은 여의도에 60층 규모 사옥을 짓겠다고 밝혔다. 대한생명 등 신동아그룹 계열사가 입주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대한생명은 1970년대 후반부터 여의도 사옥 건설을 추진했지만 당시 63빌딩 부지는 주거지역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고층 건물을 건설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78년 상업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되자 곧바로 움직였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기왕 고층 건물을 지을 바에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과시할 만큼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자”는 것이 대한생명이 63빌딩 건설에 나선 이유다.
1970년대 후반 재계에서는 사옥 건설이 유행했다. 현대그룹 계동사옥, 삼성그룹 태평로사옥, 대우센터빌딩(현 서울스퀘어) 등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63빌딩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화룡점정을 한 건물이었다. 신동아그룹의 회사 규모는 현대, 삼성, 대우 등에 비해 작았지만 사옥만큼은 이들을 압도했던 것이다. 황금빛을 머금은 국내 최고층 빌딩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85년 63빌딩 준공기념식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당시 민정당 대표위원) 등이 참석하기도 했다.
63빌딩 이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38층 높이의 롯데호텔 서울 본관이었다. 40층 이상의 건물도 없었던 시절에 60층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일본 선샤인빌딩보다도 높아 동양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선샤인빌딩과 63빌딩은 같은 60층이지만 높이는 각각 240m, 249m로 63빌딩이 더 높다. 63빌딩이 60층 높이임에도 63빌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지하 3층까지 포함해 63빌딩으로 이름을 정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63빌딩 건설 이후 신동아그룹의 부진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당시 빌딩 공급이 넘쳐나면서 63빌딩 입주자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대한생명은 임대료를 파격적으로 낮춰야만 했다. 그럼에도 원활한 입주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대한생명의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대한생명은 1984년 회계연도(1984년 4월~1985년 3월) 336억 원, 1985년 회계연도(1985년 4월~1986년 3월)에는 512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실적이 악화됐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무실 수요가 늘어나면서 63빌딩의 공실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전까지 입은 손해가 워낙 컸다. 1989년에는 신동아건설이 계열분리되고, 결국 그해 신동아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지정한 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IMF 외환위기는 신동아그룹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비슷한 시기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았고, 최순영 전 회장의 아내 이형자 씨가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의 옷값을 내줬다는 일명 ‘옷로비 사건’까지 불거졌다. 최 전 회장은 훗날 대부분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는 이미 추락한 상태였다. 신동아그룹은 1999년 해체됐다.
최순영 전 회장은 2022년 현재까지도 세금 체납과 관련한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38억 9000만 원의 세금을 체납한 최 전 회장으로부터 고가 미술품 등을 압류했다. 이에 최 전 회장 가족들이 “해당 미술품은 최 전 회장 소유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미술품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5월 최 전 회장 가족의 주장을 각하했다.
신동아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던 동아제분은 한국제분이 인수했고, 한일약품은 CJ그룹에 넘어갔다. 63빌딩 소유주인 대한생명은 1999년 예금보험공사의 공적기금 투입 후 정부 관리 하에 있다가 2002년 한화그룹이 8236억 원에 인수했다. 이후 대한생명의 사명은 한화생명으로 변경됐다. 자연스럽게 63빌딩 소유주도 한화그룹이 됐다.
대한생명 매각 과정에서 한화그룹이 정부의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한화그룹 계열사였던 충청은행, 한화종합금융 등은 수조 원의 공적자금을 지원 받은 바 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02년 국정감사에서 “한화는 1조 5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여 받은 한화종합금융이 부실하게 된 도덕적 책임을 져야 될 기업일 뿐만 아니라 생명보험 업계를 이끌 경영 노하우 등 여러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며 “다른 입찰 업체가 없다는 이유로 대한생명을 시급하게 매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우려와 달리 한화그룹은 한화생명의 경영 정상화에 성공했다. 2000년대 생명보험업계는 삼성생명이 부동의 1위였고, 한화생명과 교보생명이 2위를 놓고 다투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면서 한화생명이 자산 규모나 매출액 등에서 교보생명을 크게 앞지르며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한화생명은 지난해에도 매출 27조 1736억 원, 영업이익 1조 3520억 원의 호실적을 거뒀다.
63빌딩 역시 한화그룹 마케팅에 기여하고 있다. 63빌딩 외벽에 붙은 한화 로고는 브랜드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다. 한화그룹이 매년 주최하는 서울세계불꽃축제도 63빌딩 바로 앞에서 열린다.
63빌딩은 현재 타워팰리스, 롯데월드타워, 엘시티 등에 밀려 최고층 건물의 지위는 잃었다. 그러나 국내 금융 중심지이자 대표 관광지인 여의도에 위치한다는 점과 약 20년 동안 최고층 지위를 유지한 덕에 여전히 그 상징성은 크다. 63빌딩 60층에는 서울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57~59층에는 고급 식당이 들어서 있다. 지하 1층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족관인 ‘아쿠아플라넷 63’이 있다. 한화갤러리아 면세점도 한때 63빌딩 지하 1층에 입주했었지만 2019년 영업을 종료했다. 이 밖의 층은 대부분 사무실로 사용된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