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생산 기업들, 출하 못하거나 원료 공급 못받거나…배상 요청 검토와 함께 다른 의약품 생산 눈 돌려
스푸트니크V 백신은 러시아국부펀드(RFID)의 투자를 받아 러시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감염병‧미생물학 연구소가 개발했다. 2020년 8월 세계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으로 승인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인체에 무해한 전달체(벡터)인 아데노바이러스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제조됐다. 임상 1, 2상 결과만으로 승인돼 논란이 일었지만, 지난해 2월 국제 의학 학술지 ‘랜싯’에 임상 3상 면역 효과가 91.6%라는 논문이 실리며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가말레야 연구소는 2번 접종해야 하는 스푸트니크V 백신 외에 접종 횟수가 1번인 ‘스푸트니크 라이트 백신’도 개발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기업이 경쟁적으로 스푸트니크 백신 위탁생산 사업에 나섰다. 지난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은 후 혈전이 발생하는 사례가 잇따랐는데, 같은 방식으로 제조된 스푸트니크V 백신은 임상에서 혈전 발생 사례가 드물어 대안으로 주목 받았기 때문이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코로나19 확산세에 백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시장성도 있다고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한국코러스와 휴온스글로벌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이 각각 구성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스푸트니크 백신 위탁생산 사업을 지속하는 기업은 한국코러스와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정도다. 한국코러스 컨소시엄에는 종근당바이오‧보령바이오파마‧큐라티스‧제테마‧이수앱지스‧바이넥스 등이 참여했다. 이후 종근당바이오와 바이넥스 등이 컨소시엄에서 빠졌다. 한국코러스의 초도 물량이 공급된 이후 컨소시엄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협력키로 했기 때문에, 현재는 사실상 무한 대기 상태다. 휴온스글로벌 컨소시엄은 휴메딕스‧보란파마‧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로 구성됐었으나 지난 3월 컨소시엄 활동이 종료됐다. 이중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만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유통기한 다돼가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이미 만들어둔 물량의 유통기한이 다다른 상황까지 왔다. 한국코러스는 이미 완제품으로 만들었지만 출하하지 못한 스푸트니크 백신의 폐기 비용을 러시아 측에 부담하라고 요청하겠다는 방침이다. 완제품에 대한 소유권은 러시아 측이 갖고 있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기재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코러스는 완제품을 생산해두고 러시아 RDIF가 요청하면 병입 작업 이후 제품을 내보낼 방침이었으나 아직 출하한 물량은 없다. 위탁생산 계약을 맺은 러시아 RDIF 측에서 수출처를 정해 한국코러스에 백신 출하를 요청해야 하지만, 요청이 없어 백신 공급을 할 수 없었다. 한국코러스는 스푸트니크 라이트 백신 완제품 500만 회 분을 생산해둔 상태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법적인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인도 엔소 헬스케어 디엠씨씨, 스테리스 피티이 엘티디와 1621억 원 규모의 스푸트니크 라이트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이들 기업으로부터 원료와 소모품을 공급받아 오송공장에서 백신을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물량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차질을 빚고 있다. 엔소 헬스케어 디엠씨씨는 스푸트니크 백신 조달 및 유통을 맡는 러시아 RDIF의 공식 파트너사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이미 엔소 헬스케어 디엠씨씨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고 통보한 상황이다.
초도 물량 공급도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이들 기업의 스푸트니크 백신 위탁사업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다. 한국코러스는 원액을 활용해 스푸트니크 백신을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완제품의 경우 폐기해야 할 상황이 왔지만, 러시아로부터 공급 받은 원액은 유통기한이 이보다 길다. 한국코러스는 한국에 있는 외국 대사관을 접촉하며 스푸트니크 백신 필요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미리 확보해둔 생산 시설을 활용한 다른 의약품 생산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스푸트니크 생산물량 확대에 대비해, 지난해 충북 오송에 백신센터를 건설했다. 스푸트니크 라이트 생산을 위한 라인은 현재 가동되고 있지 않다. 최근엔 다른 백신 생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6월 미국의 베네비라(Benevira)와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해당 백신은 오송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관계자는 “현재 재조합단백질을 이용한 백신개발 협력에 착수한 상태”라며 백신센터를 백신 기지로 활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드러냈다.
한국코러스도 춘천공장의 스푸트니크 백신 완제품 라인에서 다른 의약품을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한국코러스는 기존에 있던 춘천공장에 스푸트니크 백신 생산라인을 추가했다. 한국코러스 관계자는 “백신 생산 라인은 완제품과 원액 라인으로 나뉘는데, 완제품 라인은 현재 가동하지 않고 있다. 이 라인은 바이오 의약품 생산을 위한 식품의약품안전처 실사를 검토 중”이라며 “식약처와 협의한 후 경우에 따라 바이오의약품과 백신 생산을 전환하며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전쟁 끝나면 상황 호전될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 스푸트니크 백신 위탁생산 사업을 둘러싸고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침공 국면이 끝나더라도 코로나19 백신은 정부 간 거래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러시아의 국가 이미지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백신 자체의 경쟁력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아직 스푸트니크V 백신은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 FDA(식품의약국), 유럽 EMA(유럽의약품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화이자와 모더나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백신도 나온 상황이라 스푸트니크의 시장성에 의문이 든다. 또 위탁생산 기업이 사업을 지속하려면, 비용을 들여 시설 품질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하면서 경제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침공 국면이 정상화하더라도 대외적인 교역 문제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다른 의약품 체제로 전환하는 건, 스푸트니크 백신이 최초로 등장해 경쟁 약물이 없는 혁신 신약(First in Class)은 물론, 최초는 아니지만 혁신 신약보다 효과가 좋은 계열 내 최고의 약물(Best in Class)로도 인정받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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