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자생활 중 가장 치욕스러운 경험을 한 조광래 감독. 그러나 ‘만화축구’를 꽃피울 때까지 그는 축구를 놓지 못할 것이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진주에선 딱 이틀을 보냈다. 쉬러 갔는데 거기가 더 시끄럽더라(웃음). 다들 내 문제로 감정이 격앙된 상태라 사람들 얘기 들어주는 게 힘들었다. 결국엔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는데, 이 기자한테 잡히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주에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진주로 찾아뵐 생각도 했었다(웃음). 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됐고, 이젠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많다. 만약 축구협회에서 대표팀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그 문제들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더라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이 나와 코칭스태프를 불러서 진상 조사를 하는 것이다. 즉, 대표팀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그걸 수정 보완해서 건강한 대표팀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한다. 그러나그들은 대표팀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이유로 내세워 날 자르는 데 급급했다. 기술위원회와 기술위원장이 왜 존재하는 건가? 그들은 대표팀을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닌가? 대표팀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협회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거 아닌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감독만 자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가? 이건 심각한 직무유기다.
―조 감독 자신은 대표팀에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문제없는 팀이 어디 있겠나. 박지성, 이영표가 은퇴하고 이청용마저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 기성용도 몸이 안 좋아 대표팀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지금까지 대표팀을 이끌며 최악의 상황에서 UAE전과 레바논전을 치른 것이다. 나도, 선수들도 모두 힘들어했다. 하지만 우리가 꼴찌를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본선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레바논전의 결과를 놓고 대표팀 감독을 경질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선수들도 체력적으로 힘들어 했지만 나한테 적응돼 가면서 잘 따라오는 편이었다. 물론 경기에 투입되지 못하고 벤치만 달구는 선수들 입장에선 선수 기용 방식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23명 모든 선수들을 다 게임에 뛰게 할 수는 없지 않나. 지금의 대표팀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그런 불만은 항상 존재했던 부분이다. 대표팀이 선수들한테 맞춰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 죽도 밥도 안 된다.
▲ 무작정 찾아간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조광래 감독. 그는 기사에 쓸 수 없는, 마음에 담아둔 말들을 모두 쏟아냈다. |
―코치들 사이에서 불화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기자회견에서 박태하 코치가 직접 설명하긴 했지만, 왜 이런 소문이 나돌았는지 궁금하다.
▲내가 경남FC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가마(브라질) 코치와 박태하 코치가 대표팀 초기에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외국인 코치이고 의사 소통 문제로 다른 코치들과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부분은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였고, 그런 부분이 ‘대표팀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큼 결코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다. 난 코치들과 단체로 미팅하는 것보다 일대일 미팅을 선호했다. 그래야 코치들이 속에 담아 둔 얘기를 편하게 꺼내든다.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코치들도 차츰 익숙해지면서 나한테 다소 센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난 이런 운영이 건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감독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따르는 코치는 오히려 신뢰하지 않았다.
―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되기 전 조중연 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이 있나. 평소 조 회장과 가깝게 지낸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점도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조 회장과는 사이가 좋았다.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날 대표팀 감독으로 뽑은 사람도 그 분이고 그 후로도 계속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면서 날 지지해주셨다. 레바논전에서 패한 후 조 회장께 문자도 보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이 더욱 단디해질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조 회장과 나의 관계만 놓고 봤을 땐 경질 발표되기 전에 나한테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셨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조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우려의 시선들이 많았다. 축구협회와 다른 노선을 걸었던 지도자가 대표팀 수장이 되는 데 대해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만약 성적이 좋지 않다면 누구보다 더 빨리 경질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혹시 이런 시선들을 알고 있었나.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 축구의 변화를 위해서였다. 시작은 미미하고, 어렵고, 완성되기 어려워 보이는 ‘만화축구’였겠지만 대표팀을 운영하면서 선수들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봤고, 월드컵 본선에서 내가 추구하는 축구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로 대표팀을 맡은 것이다. 난 계약기간에도 미련이 없었다. 만약 나 스스로 능력 부족을 인식했더라면 조 회장이 날 잡아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조광래가 살아온 중심은 자존심이었다. 떠밀려서 쫓겨나듯이 대표팀을 나오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더욱이 협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큰손’의 영향을 받고 있다. 날 대표팀 감독에 선임한 것도, 또 경질한 최종 결정도 그분이 한 걸로 알고 있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 또 차기 감독한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협회 운영이 그분의 힘에 좌지우지되지 않기를 바란다.
▲ 지난해 8월 조광래호 첫 소집훈련 모습. 조 감독이 선수들과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동국의 대표팀 차출 논란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 같다. 폴란드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처음으로 ‘조광래호’에 이동국을 투입시킨 이유가 여론 때문이었나.
▲동국이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조 감독은 한참 생각을 하다가 어렵게 입을 연다) 여론도 있었지만, 실제 K리그에서의 동국이 성적이 좋지 않았나. 움직임도 이전에 비해 많이 활발해졌고 득점력도 뛰어나 어떤 형태로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폴란드전에서 보여준 동국이의 플레이는 소속팀 전북현대에서 하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표팀에 합류했으면 대표팀 스타일에 녹아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점이 좀 아쉬웠다.
―이동국 선수가 대표팀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선수의 스타일 중에서 노력해서 고쳐지는 부분이 있고, 절대 바뀌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내가 보기에 동국이는 소속팀에 적응돼 있는 축구 스타일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뽑을 수 없었다. 동국이가 실력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내가 추구하는 축구랑 안 맞았을 뿐이다.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셈인데 이 자리를 통해 메시지를 남겼으면 한다.
▲글쎄…, 난 그렇게 살가운 감독이 아니다. 선수들을 나무란 뒤 토닥거리지 못했다. 그 역할은 코치들이 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프로들이다. 프로는 누가 토닥인다고, 위로해준다고 기분이 풀리고 안 풀리고 하는 게 아니다. 난 선수들이 스스로 깨우치고 이겨내서 일어서길 바랐다. 그런 선수한테는 신뢰를 보냈고,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도태되었다. 박주영, 기성용 등 많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감독님이 경질됐다’며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특히 주영이는 한국 축구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부끄럽다는 얘기도 하더라. 그러나 선수들 잘못은 없다. 모든 건 감독 탓이다. 선수들에게 내 문제로 인해 상처를 준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조 감독이 경질된 이후 차기 감독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국인 지도자가 다시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허정무 감독이 어려운 상황들을 잘 극복해서 남아공월드컵을 잘 치른 후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렇게 물러나게 돼서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안 되려고, 이렇게 돼서 ‘한국 지도자’ 운운하게 될까봐 많이 노력했고, 열정을 다 바쳤는데 중간에 이렇게 되는 바람에 다른 축구 지도자들한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협회도 감독 선임할 때 간판만 내세우지 말고, 그 감독이 제 색깔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유능한 명장을 데리고 온다고 해도 기다림이 없는 협회라면 계속 시행착오만 반복할 수 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한국 축구의 발전을 생각하는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 지가 중요하다.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 감독으로 일하는 동안 최고의 선수들과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획을 묻는 기자에게 “축구쟁이가 어디 가겠나.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서 대표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라고 대답한다.
지도자 생활하며 가장 치욕스런 경험을 한 순간에도 그는 ‘축구’를 떠올렸다. 이제 대표팀 감독에선 물러났지만 그는 분명 현장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조광래의 ‘만화축구’를 꽃피울 때까지 그는 축구를 놓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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